FTX 거래소 파산의 여파가 도미노처럼 확산되어 분위기가 뒤숭숭한 요즘이다. 투자자들도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 나오는 뉴스거리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작년 이맘때쯤 오래 가지고 있을 목적으로 암호화폐에 투자한 사람들은 1년 내내 하락장만 경험하다가 이번 사태까지 맞았다. "코인투자 다시는 안한다"는 말이 절로 나올만 하다. 하지만 의외의 모습도 눈에 띈다. 최근 암호화폐가 담긴 지갑의 개인키를 인터넷과 분리된 환경에 보관하는 '하드웨어 지갑'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한다. '개인키가 내 손에 없으면 내 코인이 아니다'라는 비트코인의 기본 사상을 이번 계기를 통해 많은 투자자들이 깨닫게 된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 생기면 은행에 가서 맡긴다. 신용카드며 핀테크 앱들이며 금융생활과 관련된 모든 인프라가 은행계좌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게 편하기도 하거니와, 자기집 금고에 보관하는것보다 은행이 더 안전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은행에 내 돈을 보관하는것이 안전할까. 비트코인을 만든 사토시 나카모토는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바로 그부분에 질문을 던졌다. 은행을 믿을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중앙은행을 믿을 수 있을까. 그들은 정말 고객인 나의 돈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할까. 비트코인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아니오'라고 내린 사람들을 위한 도피처이다. 비트코인의 탄생 목적은 은행을 대체하는 것이다. 사실 더 크게보면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화폐를 대체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알트코인(비트코인 외 모든 암호화폐)는 그 탄생 목적이 비트코인과 다르다. 알트코인은 마치 인터넷 은행이나 핀테크 앱처럼 기존 금융 시스템을 기술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탈중앙화된 금융', '개인대 개인간 전자화폐 시스템' 등 비트코인과 비슷한 메세지를 사용하지만 사실 그 둘은 엄연히 다르다. 은행과 돈을 대체하는 것은 현재 그 시스템을 기반으로 지어진 모든 금융 인프라와 서비스들을 함께 갈아엎는 결과로 이어지는 반면, 그냥 금융 인프라를 기술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돈, 즉 현대 금융의 기본 인프라를 바꾸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현대 금융의 문제는 아무런 제약과 비용도 없이 돈이 무한대로 풀려나가는 구조에 있다. 이 구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업가들의 모럴 해저드를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저금리와 양적완화 탓에 시중에는 언제나 유동성이 풍부하다. 기업들은 돈이 필요하면 은행에서 빌리거나 벤처 캐피탈에게 투자를 유치할 수 있고, 이도저도 안되면 정부에서 공적자금을 수혈받는것도 가능하다. 자본 조달 비용이 낮다보니 가능할때 최대한 많이 돈을 빌려와 레버리지를 일으키는게 좋다.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좋은 서비스를 만들어 매출을 일으키기 보다는 비용도 거의 들지 않는 공짜 돈으로 쉬운 성장을 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알트코인은 이런 전통 금융 시스템의 문제점을 그대로 답습해온 생태계다. 잘 생각해보면 테라/루나 사태도, FTX 파산도 하나같이 가치없는 토큰을 발행하여 대규모 레버리지 일으켜 빠르고 저돌적인 성장을 도모하다가 망한 케이스다. 반면 비트코인 생태계는 손쉽게 자금을 조달하는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발행량이 하드코딩되어 정해져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입맛대로 화폐 유통량이 늘어날 수도 없고, 토큰 발행이라는 기능을 이용해 대규모 채권을 발행할 수도 없다. 이는 마치 인터넷에 금을 접목하여 금융 거래를 하는 시스템이랑 비슷하다. 금은 연간 발행량이 거의 고정적인 '경화'의 특성을 지녔기 때문에 지난 수천년 인류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화폐로 사용되어왔다. 비트코인은 이것의 인터넷 버전이나 마찬가지다.
알트코인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한 기업에는 경영진에 대한 견제와 감시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 형태가 꼭 기업이 아니라 DAO(탈중앙화 조직), 소규모 프로젝트, 협동조합이여도 마찬가지다. 2000년대 초, 유명한 엔론(Enron)의 회계부정 사태가 발생했을때 미국이 법과 제도를 보완해 같은 문제를 예방한 방법도 비슷하다. 미국 의회는 회계부정에 대해 강력히 처벌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기업회계개혁법인 사베인스-옥슬리법(Sarbanes-Oxley Act)을 통과시켜 이사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기업이 별도 외감 조직을 두게하여 외부에서 경영진을 적절히 견제, 감시할 수 있게 만들었다.
FTX 거래소의 이사회는 샘 뱅크먼과 조나단 치즈맨이라는 FTX 임원, 단 두명으로 이뤄져 있었다. 사외이사로 변호사 한명이 들어와있긴 했지만 내부 의사결정에 미친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벤처 캐피털들은 스타트업에 투자를 집행한 후 내부자를 이사회에 앉혀 경영진의 부정행위를 견제하고 감시한다. 그러나 FTX의 경우 단 한 곳의 벤처 캐피털도 이사회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니 샘 뱅크먼이 FTX 고객자금을 알라메다 리서치로 넘겨 위험한 트레이딩에 사용할때 아무도 막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웹 3.0이니까", 또는 "블록체인이니까"와 같은 핑계로 샘 뱅크먼에 대한 견제를 소홀히 한거라면 FTX에 투자했던 벤처 캐피털들은 근무태만이다. 대체 이들은 지난 LTCM 사태, 엔론 사태, 또 최근에는 테라/루나 사태로부터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이들의 나태함 때문에 피해를 입은 투자자들의 돈은 누가 보상해줄까.
알트코인 생태계는 공짜 돈과 높은 레버리지가 당연시되는 현재 금융 시스템의 구조를 그대로 답습해왔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도 경영자의 부정행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견제와 감시의 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최근 해외 거래소들이 저마다 고객 자산이 들어있는 지갑 주소를 공개하며 'Proof of Reserve(준비금 증명)'에 나서고 있는데, 좋은 시도이긴 하지만 여기에도 한계가 존재한다. 거래소가 보유한 지갑이 몇개가 있는지, 고객 자산은 어떻게 배분되어있는지, 고객이 입금한 총 금액 대비 준비금은 얼마나 되는지가 중요한데 회사측에서 공개한 지갑주소만 가지고는 투자자들 입장에서 이 모든것들을 알 길이 없다. 블록체인의 거래내역은 투명하지만, 그것을 이용해 진실을 감추는 것도 쉽다.
유명 비트코이너인 닉 카터(Nic Carter)는 거래소가 전체 고객들의 계정과 자산을 익명화한 뒤 머클트리 방식으로 공개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면 고객의 개인정보를 보호하면서도 특정 기간동안 고객이 입금한 자산 금액과 해당 시점 거래소가 보유한 총 자산 금액을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 무엇이 되었든 결국 경영진에게 투명한 정보공개와 안정적인 기업운영을 이끌어내기 위해 필요한건 적절한 감시와 견제 장치다. 주식회사라면 당연히 이사회를 제대로 조직하고, 정기적으로 외부 감사를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법적 지위가 모호해 이사회 구성이나 외부감사 등의 의무가 없는 탈중앙화조직(DAO)는 어떻게 할까. 빨리 관련법을 제정하여 법의 회색지대를 없애주는 것이 중요하다.
경영자의 방만한 경영과 사기를 근절하는 또다른 원초적인 해결책은 비트코인을 법정화폐의 대체재로 도입하는 것이다. 언제든 어디서든 원할때 조달할 수 있는 값싼 돈을, 정말 필요한 제품을 만들었을때 고객에게서만 받을 수 있는 비싼 돈으로 바꾸면 된다. 이렇게 되면 최대한 많이 레버리지를 일으켜 단기간에 고성장 하는 풍토가 아닌, 차근차근 비용과 수익을 계산하여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영문화로 바뀌게 된다. 결국 비트코인이 기축통화로 사용되는 세상에서 엔론과 FTX는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비트코인이 돈을 바꾸면 사업과 투자환경도 건강해지는 세상이 온다.
안전한 크립토 투자 앱 샌드뱅크(Sandbank)의 공동 창업자 겸 COO이자 "웹3.0 사용설명서"의 저자이다. 가상자산의 주류 금융시장 편입을 믿고 다양한 가상자산 투자상품을 만들어 투자자에게 제공하는 샌드뱅크를 만들었다. 국내에 올바르고 성숙한 가상자산 투자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각종 매스컴에 출연하여 지식을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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