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직원 평균 연봉 1억 7천만원(2022년 사업보고서 기준)으로 한국 대표기업 삼성전자(평균 연봉 약 1억 5천만원)를 압도한 신의 직장이자,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한국을 찾을 때마다 그의 얼굴로 건물을 뒤덮은 회사.
바로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가 AOC(Aramco Overseas Company)를 통해 지분 71%를 가진 국내 3대 정유사 S-Oil(에쓰오일)입니다. 아람코가 무려 9조 원을 들여 건설에 착수한 세계 최대 원유 정제시설 건설사업인 샤힌(Shaheen:아랍어로 매를 뜻함) 프로젝트를 전담하는 기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람코는 아라비아반도에서 뽑아올린 원유로 자국 정제산업을 키우면 될텐데 어쩌다 머나먼 한국에 정유기업 계열사를 두게 된 걸까요? 사우디는 왜 천문학적인 돈을 한국 정유산업에 투자한 걸까요?
● 한국과 가깝던 이란의 파국…사우디 석유장관의 선견지명
사우디 석유 권력이 세계 시장 거점으로 한국에 투자를 시작한 시점은 1991년부터입니다. 아람코의 해외투자에서 가장 결정적 순간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죠. 그 배경을 이해하려면 지금도 끝이 보이지 않는 중동 전쟁의 한복판으로 잠시 들어가야 합니다.
미국이 사우디와 극적 거래(1편 참고)를 성사시켜 페트로 달러 시대를 열었던 70년대, 당시 중동은 벌써 4번째 전쟁을 치르고 있던 시기입니다. 미군과 손 잡은 사우디를 제외하면 페르시아만 일대에서 이란,이집트,쿠웨이트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던 때이기도 하죠.
아랍과 이스라엘간 4차 중동 전쟁을 치른 뒤 긴장이 높아진 지역 정세는 1979년말 이란의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슬람 혁명과 1980년 9월 앙숙이던 이라크의 이란에 대한 선제 공격으로 또 한 번 격랑에 휩싸이게 됩니다.
사우디 다음 가는 원유시장 강자였던 이란은 극단주의 이슬람 혁명을 기점으로 중동의 석유 공급망에서 완전히 이탈합니다. 중동 정세를 조정하려던 미국의 의도와 달리 이란-이라크간 전쟁이 8년간 이어지며 80년대 세계 경제와 원유 시장은 큰 변화를 겪기 시작하죠.
당시 이슬람 혁명과 이란-이라크전쟁 시기의 원유 가격의 상승과 하락 속도를 보면 최근 3년 사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유가가 치솟던 것만큼 아찔합니다.
브루킹스연구소 학술지(BPEA)가 1970년대~1980년대 원유시장 붕괴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1970년대초 영국, 독일의 원유 수요는 3배, 일본 내 수요는 7배씩 증가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에너지 수요에 민감했던 일본은 원유 중개를 해주던 엑슨(Exxon)을 통해 이란산 공급이 막힐 것을 미리 알게 되는데, 70년대 초반의 오일 쇼크로 자국 기업에 타격을 줄 것을 우려해 종합상사를 통해 원유 사재기에 나서며 가격을 밀어올리게 됩니다.
이런 심리에 불을 붙인 건 밀실 합의의 결정체였던 석유수출국기구입니다. 유가 상승이 곧 경제 성장인 이들 회원국들은 서로 가격 인상을 부추기게 되는데, 1980년 알제리에서 모인 회원국들은 전쟁 발발 3개월 만에 배럴당 10달러 후반이던 석유 가격을 36달러선까지 올려놓게 되죠.
그런데 이웃 중동 국가들의 전쟁에서 비켜나 있고, 치솟는 유가로 수혜를 입어야 할 사우디는 갈수록 줄어드는 시장 점유율로 딜레마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원유 가격이 단숨에 3배 이상 뛰었지만, 80년대 초반은 미국, 러시아, 유럽 등 비오펙 회원국의 산유량이 폭발적으로 늘어 중동을 추월하기 시작하고, 오펙이 가격을 올릴 수록 덩치를 키우는 위협적인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당시 사우디 석유장관이던 아흐메드 자키 야마니(Ahmed Zaki Yamani)는 회원국들을 비난하며 1983년 석유값 15% 인하를 이끌어내는데, 어찌된 일인지 산유국 형님 격인 사우디만 홀로 3년에 걸쳐 연간 석유 매출의 4/5에 해당하는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됩니다. 산유량을 파악하기 어려운 허점을 이용해 오펙 회원국들이 몰래 할당량을 위반해 생산하는 걸 통제하지 못했던 겁니다.
● 가격 폭락 감수한 절대 군주…사우디 석유 수저 기틀을 잡다
시장 점유율도, 실리도 모두 잃게 된 상황을 해결한 인물은 이븐 사우드 초대 국왕의 아들(40명) 가운데 한 명이자 5번째 사우디 왕위에 오른 파드 국왕(파드 빈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입니다. 석유 산업 전문가였던 그는 1986년 석유장관이던 야마니를 경질하고 왕가에서 직접 외교와 자원 통제에 나서게 됩니다.
사우디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주로 평가받는 파드 국왕은 오펙 회원국들의 꼼수 생산에 분노하며 자국의 막대한 매장량을 발판으로 점유율 경쟁을 벌입니다.
사우디는 석유시장 점유율 회복을 위해 원유 정제기업에 일정액의 수익을 보장하는 일종의 반짝 할인 정책까지 동원하는데, 당시 뉴욕타임스 등 보도를 보면 사우디는 그야말로 판로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우디의 이런 가격 조작과 원유 증산 움직임에 세계 원유 현선물 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서부텍사스산원유 선물 시장이 막 국제시세로 자리잡아가던 당시 사우디의 공격적인 가격 인하 정책으로 선물 가격이 추락하면서 한때 배럴당 31달러를 웃돌던 석유 가격은 무려 70% 넘게 하락합니다.
석유를 뽑아올려봐야 손해가 나고, 정제 후 마진이 남지 않던 미국 내 주유소에서 석유를 0달러에 파는 판촉 행사를 해야 할 정도 충격을 준 파드 국왕은 미국 조지 부시 당시 부통령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일 정도로 세계 정치,경제에 다시금 영향력을 입증하게 되죠.
● 쌍용 아니고 사우디의 'S'?…기사회생 발판이 된 비산유국 한국·일본
그리고 사우디의 막대한 생산량을 받아주며 점유율 회복의 발판들 놓아준 나라들 중에 하나가 바로 한국과 일본입니다.
원유 증산만으로 점유율 회복에 한계를 느낀 사우디는 우방국인 미국 텍사코에 지분을 투자해 생산량 절반을 넘기고, 나머지는 원유 순수입국이자 정제산업이 발달한 일본, 한국과 차례로 투자를 진행하기에 이릅니다.
사우디는 자국 석유화학기업인 사빅(SABIC)을 통해 79년부터 미국 엑슨모빌(ExxonMobil), 쉘(당시 로열 더치 쉘), 80년대초 일본 최대 종합기업인 미쓰비시와 정제공장을 키워왔지만 해외에 본격 거점을 둔 건 한국이 처음입니다.
현재 한국 주요 정유사들의 지분 구조를 보면 미국 쉐브론(GS칼텍스의 지분 50% 보유), 사우디 아람코(에쓰오일의 지분 71% 보유, HD현대오일뱅크의 지분 17% 보유), 한때 걸프오일(옛 유공 투자 후 철수, 현재의 SK이노베이션) 등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석유를 뽑아올리기만 하던 이들 기업은 안정적 장기 공급계약과 함께 원유 찌꺼기를 정제해 상품으로 만드는 추가 수익까지 확보하는 아시아 거점으로 한국을 선택한 겁니다.
이 가운데 투자규모가 가장 큰 사우디 아람코 계열사 에쓰오일은 본래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이전 이란국영석유회사와 쌍용양회가 반반씩 출자해 출발한 한이석유가 모태입니다. 그러다 이란이 국제시장에서 퇴출된 빈자리를 1991년 사우디가 원유공급 계약을 맺으며 주주로 진입하고, 1997년 외환위기에 무너진 쌍용그룹으로부터 35% 지분을 넘겨받아 최대주주 자리에 오릅니다.
두 나라간 경제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2012년 에쓰오일은 통상 1년 단위인 원유 공급계약을 20년 단위 장기 계약으로 전환하고, 2014년 한국석유공사로부터 부지를 매입한 뒤 작년 11월 우리 돈 9조 원 규모의 스팀 크래커, 세계 최대규모의 원유정제 시설을 짓는 핵심 기업으로 성장합니다.
● 아람코 최대 파트너, 더이상 한국 아니다.."에너지 안보" 외치는 이 나라
그런데 이 시설이 정말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기에 호들갑스러운 걸까요? 본래 정유사들은 원유를 받아 휘발유, 경유 등으로 매출 80% 이상을 내고 있고, 폴리프로필렌 등 고도화 제품을 만들기까지 수율이 10%를 넘지 않아 그 한계가 명확합니다. 원유 가격 의존이 크고 추가 수익은 부수적인 셈이죠.
그런데 사우디 석유 자본은 더 멀리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른바 '석유에서 화학으로(Oil to Chemical)'를 모토로 해외 합작과 인수합병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겁니다. 반도체 핵심 산업 소재를 생산 중인 일본 스미토모화학과 2005년 홍해 연안에 라빅(Rabigh) 정제시설을 구축하고, 네덜란드 DSM과 미국 GE케미칼을 차례로 인수하며 토목건축 필름. 포장재. 복합소재 등에서 시장 영향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과 미국 시장 확장에 필수적인 연결 고리가 한국입니다. 국내에 이미 5조원 규모의 고도화 시설(잔사유고도화시설 RUC·올레핀하류시설 ODC)을 가동해 기존 화학사들 수준인 프로필렌 수율을 25%까지 높일 수 있게 됐습니다.
여기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방한 이후 착공에 들어간 9조원 규모 스팀 크래커는 이런 고부가제품의 원료로 쓰일 일종의 중간단계 제품을 뽑아내는 공정으로 완공 이후에 생산량, 수율 면에서 말그대로 사우디산 석유만 주유소에 공급하던 기업의 이미지를 '화학기업'으로 바꿀 준비를 하고 있죠. 20세기 석유자본의 상징이던 사우디는 나아가 청정 암모니아 정제 기술로 일본, 한국에 첫 선적을 시작하며 마지막 석유 시대를 준비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 석유만 뽑아내며 '업스트림' 영역에 머물렀던 아람코는 2017년 사우디 국부펀드가 중동 최대 석유화학기업 사빅(SABIC) 지분 70%를 약 691억 달러(약 80조원)에 인수하면서 석유를 뽑아 시장에 공급하는 모든 과정을 손에 쥐게 됐습니다.
석유 산업 구조는 석유(Crude oil)/천연가스(NGL) 채굴과 정제, 즉 석유를 뽑아올리는 업스트림(상류)과 정제,저유소, 친환경 자원인 블루 암모니아 신사업 등 등 다운스트림(하류)으로 나뉘는데 자국과 해외 거점을 통해 상류와 하류 플랫폼을 모두 통째로 움직일 수 있게 된겁니다.
지난해 기준 사우디 아람코 업스트림 부문만 연간 매출 우리 돈으로 약 562조 원, 영업이익 392조 8천억 원, 다운스트림은 지난해 매출 약 400조 원, 영업이익 28조 3천억원을 기록 했습니다. 정제 사업부문 실적이 삼성전자와 비견될 만큼 거대한 기업입니다.
여기까지 소식만으로 보면 아람코를 통해 사우디가 우리나라에 큰 비중을 두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빠른 속도로 우리의 정보기술과 중화학 산업을 잠식하고 있는 나라가 바로 중국입니다. 이미 아람코는 중국 시노펙을 비롯해 합작사를 시도해왔고 롱셩페트로케미컬지분 10% 인수하는 등 막대한 투자를 시작했기 때문이죠. 사우디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까요?
중국은 사우디 왕실에 비판적인 언론인 까슈끄지 피살로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가 악화하던 시기에 맞춰 막대한 자본과 자국 기술을 앞세워 에너지 시장 주도권을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미 사우디 최대 무역상대국이자 최대 원유수입 국가인 중국은 안정적 원유 수급을 확보하면서 미국의 영향력까지 줄이는 기회로 보고 있는 겁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도 언론 인터뷰에서 예고한대로 '동쪽의 나라' 중국, 러시아를 돕는 역할을 차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해 미국 싱크탱크 유라시아 그룹의 아이햄 카말 중동·북아프리카 연구팀장은 세계적인 에너지 전환 움직임 속에서 양국이 정치적으로 수용 가능한 협력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공통의 인식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역사책에서만 보고 체감하지 못한 사실이지만 아라비아반도와 중국은 1500년전 실크로드로 교역하던 교역 상대였고, 지금도 사우디아라비아 최대 교역 상대국은 중국인 겁니다. 2021년 기준 양국 간 무역 규모는 870억 달러로 전년보다 30% 증가했고, 중국의 사우디 원유 수입액은 439억 달러로 전체 사우디 상품 수입액의 77%를 차지합니다.
사우디의 다음 행보는 지난달 '2023 중국 개발 포럼'에 참석한 아민 나세르 대표이사의 축사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아민 나세르 대표는 '중국의 에너지 및 개발 우선 순위를 지원하기 위한 세가지 주요 전략'을 언급하며 장기적인 에너지 안보 협력, 지리·르노 합작사 투자 의향, 랴오닝성에 건설하는 최첨단 정유·화학 단지 건설 등의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한편으로 이런 중국의 광폭 행보와 에너지 시장의 재편은 한국에게 반가운 소식은 아닙니다.
글로벌 에너지기업인 BP가 집계한 나라별 정제능력은 미국이 하루 1,897만 배럴(2020년 기준)으로 1위, 중국이 1619만 배럴로 2위, 한국은 339만 배럴로 3위입니다. IEA에 따르면 중국은 헝리(Hengli), 저장(Zhejiang) 등이 신규 대형 설비를 가동하면서 미국과 맞먹는 공급량으로 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그동안 중국을 상대로 최대 석유화학 수출국 지위를 누려온 한국 기업들에게도 영향을 주는 변화입니다. 중국은 사우디와 협력을 제외하고도 국영기업 시노펙, 롱셩 등을 통해 기초유분 에틸렌 생산 능력을 2017년 대비 3배 이상 높이고 자국 석유화학 규모를 키우고 있습니다. 정부가 공개한 수출입 실적에서 지난해 석유화학 수출에서 중국 비중은 38%로 전년 대비 0.3%포인트 증가에 그치기도 했습니다.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 등 신뢰를 쌓아온 중동 국가들과의 원전, 과학기술 협력 등으로 장기간 협력을 새로 구축하고 있지만, 막대한 자본와 에너지를 무기로 국제 정세 변화를 이끄는 중국의 움직임으로 인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할 위치게 놓이게 됐습니다.
김종학기자 jhkim@wow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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