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훈종의 알쓸₿잡 <30>
◇쇄락하는 핀테크 제왕 페이팔
미국 온라인 결제업체 페이팔은 1998년 피터 틸, 루크 노셀, 켄 하우리가 세운 콘피니티(Confinity)라는 회사가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X.com에 인수되면서 1999년에 탄생했다. 페이팔 초창기 팀원들은 대부분 창업가의 길을 걸어 각자 영향력 있는 회사들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피터 틸은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 일론 머스크는 ‘테슬라와 ‘스페이스X’, 리드 호프먼은 ‘링크드인’, 스티브 첸과 채드 헐리는 ‘유튜브’, 맥스 레브친은 ‘슬라이드’와 ‘어펌’, 제러미 스토플먼은 ‘옐프’를 창업했다. 이들은 실리콘 밸리 스타트업 생태계에 미친 영향력이 워낙 막강해 ‘페이팔 마피아’라 칭해진다.
페이팔은 쉽게 말하면 구매자와 판매자의 중간에서 거래를 중계해주는 일종의 에스크로 서비스다. 구매자가 페이팔에 돈을 내면 페이팔이 그 돈을 판매자에게 전달한다. 페이팔을 이용하면 서로 신용카드 번호나 계좌 번호를 알리지 않고도 거래할 수 있어서 편하다. 서로 사용하는 통화가 다르더라도 페이팔에서 환전을 거쳐 거래해주기 때문에 서로 다른 국가의 사람들끼리도 거래할 수 있다. 국내에선 2015년부터 서비스를 시작했다. 직불카드나 신용카드를 등록해 놓으면 간편하게 해외 결제와 송금을 할 수 있고 환율도 자동으로 조정돼 주로 해외 직구족들이 이용해왔다. 송금 수수료는 송금액의 3~4% 정도만 내면 돼서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페이팔은 전 세계 사용자 수가 무려 3억9200만명에 달한다. 작년 매출이 257억5000만 달러(약 300조 원)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핀테크 기업으로 몸집을 불렸다. 그런데 핀테크 산업을 영원히 호령할 것만 같던 페이팔 마피아들의 본산이 안타깝게도 올해 들어 조금씩 침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결제시장 패러다임의 변화
지난 2월1일 페이팔은 작년 4분기 실적을 발표했다. 매출액은 69억2000만 달러로 시장 예상치인 68억9000만 달러를 소폭 웃돌았다. 하지만 주당 순이익은 1.11 달러로 시장 예상치인 1.12 달러에 못 미쳤다. 올해 예상 실적도 실망스러웠다. 시장 전망치는 5.25 달러였는데 페이팔은 예상 주당 순이익을 4.60~4.75 달러로 발표했다. 예상 신규 가입자 1500만~2000만 명도 월가 예상치인 5300만 명을 훨씬 밑도는 수준이었다. ‘어닝 쇼크’에 시장은 곧바로 반응했다. 페이팔 주가는 다음 날 24.6%나 폭락했고 지금까지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페이팔의 실적 성장세가 둔화하는 이유는 뭘까. 아크인베스트 설립자인 캐시 우드는 답을 알고 있는 듯하다. 지난 8일 미국 마이애미에서 성황리에 끝난 ‘비트코인 2022 컨퍼런스’에서 캐시 우드는 페이팔 보유 지분을 모두 처분했다고 밝혔다. 그는 페이팔보다 비트코인 라이트닝 네트워크를 활용한 캐시앱(Cash App)이 결국 승자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라이트닝 네트워크는 비트코인의 느린 처리 속도를 해결하기 위해 개별 거래를 별도의 채널에서 처리한 후 그 결과값만 블록체인에 기록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프로토콜이다. 비트코인 관련 기술 개발사인 블록스트림은 현재 라이트닝 네트워크의 초당 처리 건수(TPS)가 4000만 건에 달해 비자카드(2만4000건)보다 약 1660배나 빠른 수준이라고 밝혔다. 겨우 193건을 처리하는 페이팔에 비해서는 거의 20만 배나 빠를 만큼 압도적인 처리 속도다.
블록(Block)사가 운영하는 캐시는 미국과 영국에 7000만 명 상당의 개인과 오프라인 소매점 고객을 거느린 모바일 간편결제 서비스 앱이다. 트위터 창업자인 잭 도시가 이끌고 있으며 그가 트위터 대표직을 완전히 내려놓고 블록 경영에만 집중한 이후부터는 더욱 적극적으로 비트코인을 도입하는 중이다. 캐시앱은 지난 1월 12일 라이트닝 네트워크를 연동했다. 이 덕분에 캐시앱 이용자는 전 세계 누구에게든 거의 실시간으로, 그것도 무료로 비트코인을 보낼 수 있다.
미국의 CNBC 방송은 지난 3일 라이트닝 네트워크가 실제로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진행했다. 미국에 있는 기자가 폴란드에 거주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인 ‘알레나 보로비오바 (Alena Vorobiova)’에게 비트코인을 전송해본 것이다. 보로비오바의 휴대전화에 비트코인 지갑을 다운로드 받고, 라이트닝 네트워크를 통해 미국에서 폴란드로 비트코인을 전송했다. ‘Wroclaw’라는 도시에 있는 비트코인 ATM 기계에서 폴란드 현지 화폐로 찾는 데는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알레나는 고향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침공당하기 전까지는 비트코인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던 사람이다. 그러나 하늘에 포탄이 날아다니고 국경이 닫혔다. 우크라이나 전역의 은행과 ATM에서 현금이 떨어지고 중앙은행이 모든 온라인 결제와 송금까지 막아버리자 대책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녀는 비트코인과 라이트닝 네트워크를 통하면 은행, 신용카드 등 기존 금융 인프라를 전혀 거치지 않고도 금융거래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페이팔은 23개국 통화의 송금을 지원한다. 하지만 기존 은행과 신용카드 기반의 전통 금융 인프라를 거쳐야만 이용이 가능한 서비스다. 은행과 신용카드사는 국경을 넘는 자유로운 돈의 이동을 최대한 억제하고 싶어 하는 기관들이다.
아쉽지만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핀테크 후진국인 우리나라에선 외국환관리법 등의 이유로 페이팔을 이용해 해외로 ‘원화’를 직접 송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외로 돈을 보내려면 반드시 해외 결제가 가능한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를 연결해야 한다. 은행 계좌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돈을 찾아가는 용도로만 사용될 뿐이다.
알레나처럼 전쟁 때문에 옆 나라인 폴란드로 이주한 사람들이 과연 그곳에서 자유롭게 은행 계좌와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을까. 폴란드가 우리나라처럼 페이팔을 통한 자국 통화의 해외 반출을 금지하면 알레나는 본국에 어떻게 돈을 보낼 수 있을까. 아직 우크라이나에 남은 사람들은 은행과 ATM이 문을 닫고 온라인 송금과 결제가 막혀버린 상황에서 어떻게 해외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 은행과 신용카드라는 거대한 중간자를 거치지 않으면 아무런 금융거래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알레나를 비롯한 전 세계의 많은 사람에게 절망적인 현실이다.
◇금융의 탈물질화
최근 들어 페이팔 순이익이 감소하고 주가가 폭락하는 이유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간자를 없애 자유로운 결제와 송금을 할 수 있는 비트코인과 라이트닝 네트워크로 기초 인프라를 이전하는 블록과 같은 기업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페이팔은 아직 전통 인프라에 남아 허우적대고 있다. 페이팔의 기업가치가 쪼그라드는 현상은 돈이 이동하는 과정에 빽빽하게 들어선 중간자들이 앞으로 점점 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컨센서스가 시장에 형성되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돈은 순수한 정보의 형태로, 광속으로 전달될 수 있는 전자 비트로 변해 가면서 빠르게 물질성을 벗어던지고 있다. 새로운 사이버스페이스 경제에서는 돈의 탈물질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뉴욕시에서만 하루에 1조 9000억 달러가 넘는 돈이 전자 네트워크로 거래되고 있다.”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2000년에 출간한 ‘소유의 종말(The Age of Access)’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출간한 지 21년이 지난 이 책에서 이미 돈의 탈물질화(Dematerialization)을 예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가 비트코인의 등장까지 예상했는지는 모르겠다. 나카모토 사토시가 2009년 세상에 공개한 비트코인은 돈을 순수한 정보의 형태로 전달할 뿐만 아니라 은행, 신용카드 등 물리적 중간자들까지 없는 안전하고 튼튼한 네트워크이다.
반면 페이팔을 이용하여 돈을 보내면 마치 돈이 페이팔 안에서 즉각 보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옮겨진 것은 스크린에 보이는 숫자일 뿐이다. 실제 돈은 페이팔 → VAN 사업자 → 신용카드사 → 은행을 거쳐 다시 수신자 국가의 페이팔 → VAN 사업자 → 신용카드사 → 수신자 은행으로 옮겨지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단계가 많으면 당연히 그만큼 수수료가 붙고 속도도 느릴 수밖에 없다.
페이팔을 비롯한 해외송금 서비스들의 최대 단점은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용자에게 건당 3~4%씩 수수료를 떼어갈 수밖에 없다. 이용자의 이름, 주소, 생년월일, 납세자 식별번호 등을 모두 받아놓았다가 신원인증을 마친 사람에게만 인출을 허락해야 하는 점도 불편하다. 이런 만성적인 불편함의 고리를 끊을 수가 없다.
반면 알레나의 실험에서 보았듯이 비트코인과 라이트닝 네트워크를 통한 송금은 금액에 상관없이 거의 무료이다. 3분도 기다릴 필요 없이 눈 깜짝할 새에 송금이 완료된다. 복잡한 신원인증 과정과 신용카드 등록도 필요 없다. 송금 과정에 가득 들어찬 중간자들이 없기 때문에 훨씬 깔끔한 거래가 가능하다.
더욱 기대되는 점은 라이트닝 네트워크가 계속 진화 중이라는 사실이다. 지난 5일 라이트닝 네트워크 개발사인 라이트닝 랩스(Lightning Labs)는 라이트닝 네트워크 위에서 달러 기반 스테이블 코인으로 거래할 수 있는 ‘Taro (Taproot asset representation overlay)’ 프로토콜을 개발 중이라고 발표했다. 간단히 말하면 비트코인 네트워크를 통해 달러를 송금할 수 있는 기능이다. 달러가 더 이상 은행과 신용카드를 거치지 않고 움직이는 세상이 곧 온다.
달러 뿐 만이 아니라 모든 통화와 자산을 비트코인 네트워크 위에서 거래하는 세상이 온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운 미래에 브레튼우즈 체제 이후 70년 만에 달러 기축통화 체제가 막을 내리고 ‘비트코인 스탠다드 (Bitcoin standard, 비트코인이 전 세계 기축통화인 세상)’가 도래한 세상을 목격하게 될 수 있다.
◇쇄락하는 핀테크 제왕 페이팔
미국 온라인 결제업체 페이팔은 1998년 피터 틸, 루크 노셀, 켄 하우리가 세운 콘피니티(Confinity)라는 회사가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X.com에 인수되면서 1999년에 탄생했다. 페이팔 초창기 팀원들은 대부분 창업가의 길을 걸어 각자 영향력 있는 회사들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피터 틸은 ‘팔란티어 테크놀로지스’, 일론 머스크는 ‘테슬라와 ‘스페이스X’, 리드 호프먼은 ‘링크드인’, 스티브 첸과 채드 헐리는 ‘유튜브’, 맥스 레브친은 ‘슬라이드’와 ‘어펌’, 제러미 스토플먼은 ‘옐프’를 창업했다. 이들은 실리콘 밸리 스타트업 생태계에 미친 영향력이 워낙 막강해 ‘페이팔 마피아’라 칭해진다.
페이팔은 쉽게 말하면 구매자와 판매자의 중간에서 거래를 중계해주는 일종의 에스크로 서비스다. 구매자가 페이팔에 돈을 내면 페이팔이 그 돈을 판매자에게 전달한다. 페이팔을 이용하면 서로 신용카드 번호나 계좌 번호를 알리지 않고도 거래할 수 있어서 편하다. 서로 사용하는 통화가 다르더라도 페이팔에서 환전을 거쳐 거래해주기 때문에 서로 다른 국가의 사람들끼리도 거래할 수 있다. 국내에선 2015년부터 서비스를 시작했다. 직불카드나 신용카드를 등록해 놓으면 간편하게 해외 결제와 송금을 할 수 있고 환율도 자동으로 조정돼 주로 해외 직구족들이 이용해왔다. 송금 수수료는 송금액의 3~4% 정도만 내면 돼서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페이팔은 전 세계 사용자 수가 무려 3억9200만명에 달한다. 작년 매출이 257억5000만 달러(약 300조 원)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핀테크 기업으로 몸집을 불렸다. 그런데 핀테크 산업을 영원히 호령할 것만 같던 페이팔 마피아들의 본산이 안타깝게도 올해 들어 조금씩 침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결제시장 패러다임의 변화
지난 2월1일 페이팔은 작년 4분기 실적을 발표했다. 매출액은 69억2000만 달러로 시장 예상치인 68억9000만 달러를 소폭 웃돌았다. 하지만 주당 순이익은 1.11 달러로 시장 예상치인 1.12 달러에 못 미쳤다. 올해 예상 실적도 실망스러웠다. 시장 전망치는 5.25 달러였는데 페이팔은 예상 주당 순이익을 4.60~4.75 달러로 발표했다. 예상 신규 가입자 1500만~2000만 명도 월가 예상치인 5300만 명을 훨씬 밑도는 수준이었다. ‘어닝 쇼크’에 시장은 곧바로 반응했다. 페이팔 주가는 다음 날 24.6%나 폭락했고 지금까지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페이팔의 실적 성장세가 둔화하는 이유는 뭘까. 아크인베스트 설립자인 캐시 우드는 답을 알고 있는 듯하다. 지난 8일 미국 마이애미에서 성황리에 끝난 ‘비트코인 2022 컨퍼런스’에서 캐시 우드는 페이팔 보유 지분을 모두 처분했다고 밝혔다. 그는 페이팔보다 비트코인 라이트닝 네트워크를 활용한 캐시앱(Cash App)이 결국 승자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라이트닝 네트워크는 비트코인의 느린 처리 속도를 해결하기 위해 개별 거래를 별도의 채널에서 처리한 후 그 결과값만 블록체인에 기록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프로토콜이다. 비트코인 관련 기술 개발사인 블록스트림은 현재 라이트닝 네트워크의 초당 처리 건수(TPS)가 4000만 건에 달해 비자카드(2만4000건)보다 약 1660배나 빠른 수준이라고 밝혔다. 겨우 193건을 처리하는 페이팔에 비해서는 거의 20만 배나 빠를 만큼 압도적인 처리 속도다.
블록(Block)사가 운영하는 캐시는 미국과 영국에 7000만 명 상당의 개인과 오프라인 소매점 고객을 거느린 모바일 간편결제 서비스 앱이다. 트위터 창업자인 잭 도시가 이끌고 있으며 그가 트위터 대표직을 완전히 내려놓고 블록 경영에만 집중한 이후부터는 더욱 적극적으로 비트코인을 도입하는 중이다. 캐시앱은 지난 1월 12일 라이트닝 네트워크를 연동했다. 이 덕분에 캐시앱 이용자는 전 세계 누구에게든 거의 실시간으로, 그것도 무료로 비트코인을 보낼 수 있다.
미국의 CNBC 방송은 지난 3일 라이트닝 네트워크가 실제로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진행했다. 미국에 있는 기자가 폴란드에 거주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인 ‘알레나 보로비오바 (Alena Vorobiova)’에게 비트코인을 전송해본 것이다. 보로비오바의 휴대전화에 비트코인 지갑을 다운로드 받고, 라이트닝 네트워크를 통해 미국에서 폴란드로 비트코인을 전송했다. ‘Wroclaw’라는 도시에 있는 비트코인 ATM 기계에서 폴란드 현지 화폐로 찾는 데는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알레나는 고향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침공당하기 전까지는 비트코인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던 사람이다. 그러나 하늘에 포탄이 날아다니고 국경이 닫혔다. 우크라이나 전역의 은행과 ATM에서 현금이 떨어지고 중앙은행이 모든 온라인 결제와 송금까지 막아버리자 대책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녀는 비트코인과 라이트닝 네트워크를 통하면 은행, 신용카드 등 기존 금융 인프라를 전혀 거치지 않고도 금융거래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페이팔은 23개국 통화의 송금을 지원한다. 하지만 기존 은행과 신용카드 기반의 전통 금융 인프라를 거쳐야만 이용이 가능한 서비스다. 은행과 신용카드사는 국경을 넘는 자유로운 돈의 이동을 최대한 억제하고 싶어 하는 기관들이다.
아쉽지만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핀테크 후진국인 우리나라에선 외국환관리법 등의 이유로 페이팔을 이용해 해외로 ‘원화’를 직접 송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외로 돈을 보내려면 반드시 해외 결제가 가능한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를 연결해야 한다. 은행 계좌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돈을 찾아가는 용도로만 사용될 뿐이다.
알레나처럼 전쟁 때문에 옆 나라인 폴란드로 이주한 사람들이 과연 그곳에서 자유롭게 은행 계좌와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을까. 폴란드가 우리나라처럼 페이팔을 통한 자국 통화의 해외 반출을 금지하면 알레나는 본국에 어떻게 돈을 보낼 수 있을까. 아직 우크라이나에 남은 사람들은 은행과 ATM이 문을 닫고 온라인 송금과 결제가 막혀버린 상황에서 어떻게 해외 지원을 받을 수 있을까. 은행과 신용카드라는 거대한 중간자를 거치지 않으면 아무런 금융거래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알레나를 비롯한 전 세계의 많은 사람에게 절망적인 현실이다.
◇금융의 탈물질화
최근 들어 페이팔 순이익이 감소하고 주가가 폭락하는 이유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간자를 없애 자유로운 결제와 송금을 할 수 있는 비트코인과 라이트닝 네트워크로 기초 인프라를 이전하는 블록과 같은 기업들이 늘고 있다.
하지만 페이팔은 아직 전통 인프라에 남아 허우적대고 있다. 페이팔의 기업가치가 쪼그라드는 현상은 돈이 이동하는 과정에 빽빽하게 들어선 중간자들이 앞으로 점점 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컨센서스가 시장에 형성되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돈은 순수한 정보의 형태로, 광속으로 전달될 수 있는 전자 비트로 변해 가면서 빠르게 물질성을 벗어던지고 있다. 새로운 사이버스페이스 경제에서는 돈의 탈물질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뉴욕시에서만 하루에 1조 9000억 달러가 넘는 돈이 전자 네트워크로 거래되고 있다.”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2000년에 출간한 ‘소유의 종말(The Age of Access)’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출간한 지 21년이 지난 이 책에서 이미 돈의 탈물질화(Dematerialization)을 예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가 비트코인의 등장까지 예상했는지는 모르겠다. 나카모토 사토시가 2009년 세상에 공개한 비트코인은 돈을 순수한 정보의 형태로 전달할 뿐만 아니라 은행, 신용카드 등 물리적 중간자들까지 없는 안전하고 튼튼한 네트워크이다.
반면 페이팔을 이용하여 돈을 보내면 마치 돈이 페이팔 안에서 즉각 보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옮겨진 것은 스크린에 보이는 숫자일 뿐이다. 실제 돈은 페이팔 → VAN 사업자 → 신용카드사 → 은행을 거쳐 다시 수신자 국가의 페이팔 → VAN 사업자 → 신용카드사 → 수신자 은행으로 옮겨지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단계가 많으면 당연히 그만큼 수수료가 붙고 속도도 느릴 수밖에 없다.
페이팔을 비롯한 해외송금 서비스들의 최대 단점은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용자에게 건당 3~4%씩 수수료를 떼어갈 수밖에 없다. 이용자의 이름, 주소, 생년월일, 납세자 식별번호 등을 모두 받아놓았다가 신원인증을 마친 사람에게만 인출을 허락해야 하는 점도 불편하다. 이런 만성적인 불편함의 고리를 끊을 수가 없다.
반면 알레나의 실험에서 보았듯이 비트코인과 라이트닝 네트워크를 통한 송금은 금액에 상관없이 거의 무료이다. 3분도 기다릴 필요 없이 눈 깜짝할 새에 송금이 완료된다. 복잡한 신원인증 과정과 신용카드 등록도 필요 없다. 송금 과정에 가득 들어찬 중간자들이 없기 때문에 훨씬 깔끔한 거래가 가능하다.
더욱 기대되는 점은 라이트닝 네트워크가 계속 진화 중이라는 사실이다. 지난 5일 라이트닝 네트워크 개발사인 라이트닝 랩스(Lightning Labs)는 라이트닝 네트워크 위에서 달러 기반 스테이블 코인으로 거래할 수 있는 ‘Taro (Taproot asset representation overlay)’ 프로토콜을 개발 중이라고 발표했다. 간단히 말하면 비트코인 네트워크를 통해 달러를 송금할 수 있는 기능이다. 달러가 더 이상 은행과 신용카드를 거치지 않고 움직이는 세상이 곧 온다.
달러 뿐 만이 아니라 모든 통화와 자산을 비트코인 네트워크 위에서 거래하는 세상이 온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운 미래에 브레튼우즈 체제 이후 70년 만에 달러 기축통화 체제가 막을 내리고 ‘비트코인 스탠다드 (Bitcoin standard, 비트코인이 전 세계 기축통화인 세상)’가 도래한 세상을 목격하게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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