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금리인상 유탄…달러빚 급증
신흥국에서 ‘도미노 디폴트(채무 불이행)’가 터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신흥국들은 인플레이션의 직격탄을 맞았다. 여기에 초강세를 보이는 달러 빚까지 불어나 경제위기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다파이낸셜타임스(FT)는 “신흥국들이 높은 물가와 강달러라는 어려움에 직면했다”며 “(지난 5월 디폴트를 선언한) 스리랑카의 붕괴는 더 큰 위기의 전조일 수 있다”고 1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기초체력이 취약한 신흥국들이 스리랑카의 뒤를 따라 연쇄 디폴트의 길로 빠질 수 있다는 얘기다. 블룸버그이코노믹스는 디폴트 위기에 가장 취약한 5개국으로 엘살바도르, 가나, 이집트, 튀니지, 파키스탄을 꼽았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미국 중앙은행(Fed)의 고강도 긴축이 신흥국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고 FT는 전했다. 금리 인상에 따른 강달러 현상으로 신흥국의 달러 표시 국채 상환 부담이 커졌다. 국제금융협회(IIF)가 신흥국 20곳을 조사한 결과 국내총생산(GDP) 대비 달러 표시 부채 비율은 올해 1분기 평균 24.6%로 2019년 말보다 1.1%포인트 높아졌다.
달러와 미국 국채로 투자 자금이 쏠리고 있는 것도 부담이다. JP모간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달까지 신흥국 채권시장에서 유출된 자금은 520억달러(약 69조원)에 달한다. 통화 가치 하락으로 신흥국의 수입 물가가 치솟으면서 가뜩이나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가중될 위험도 커지고 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신흥국의 30%, 저소득국의 60%가 부채 상환 위기에 빠졌거나 빠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고물가에 美 금리인상 '겹악재'…신흥국 30% 빚상환 못할 수도
지난 9일 스리랑카에선 경제난을 참다못한 시민들이 대통령궁을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시민들의 분노에 대통령은 해외로 도피한 뒤 사임했다. 시위대는 해산했지만 올 5월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한 스리랑카는 여전히 격랑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신흥국들이 고물가에 이어 달러 강세에 따른 자국 통화가치 절하로 휘청이고 있다. 신흥국 국민들의 삶은 팍팍해지고, 대외 부채가 급증한 정부는 디폴트 위기에 맞닥뜨렸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스리랑카의 경제적·정치적 위기는 다른 많은 신흥국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잠재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스리랑카는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최악의 외환위기에 빠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코로나19 사태로 주력 산업인 관광업이 위축되면서 외환보유액이 고갈되자 5월 디폴트를 공식화했다.
세계 최대 밀 수입국인 이집트는 스리랑카의 뒤를 이어 디폴트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국가로 꼽힌다. 이집트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밀 가격이 폭등한 상황에서도 전체 국민의 70%에게 빵 구입을 위한 보조금을 지급했다. 결국 재정난이 심화됐고 이집트 정부는 5월 세계은행(WB)으로부터 5억달러(약 6600억원)를 빌려와야 했다.
JP모간에 따르면 이집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은 95%에 육박한다. 미국의 금리 인상 여파 등으로 유출된 자본은 약 110억달러에 이른다.
파키스탄의 디폴트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파키스탄은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외환보유액 감소로 발전 연료 수입에 어려움을 겪었다. 일부 지역에서 단전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로이터통신은 16일(현지시간) “파키스탄의 외환보유액은 5주치 수입 규모인 98억달러까지 줄었다”며 “파키스탄 통화인 루피는 사상 최저치로 약세를 보였다”고 전했다.
파키스탄은 지난달 물가 상승률이 21.3%(전년 동기 대비)에 달하는 등 인플레이션도 심각하다. 달러 강세로 수입 물가가 치솟으면서 인플레이션에 기름을 붓고 있다. 파키스탄은 일단 급한 불은 껐다. 14일 국제통화기금(IMF)과의 실무 협상에서 11억7000만달러를 추가 지원받는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비트코인 투자 손실을 본 엘살바도르가 위험 국가로 분류된다. 엘살바도르는 내년 1월 8억달러 규모의 외채를 상환해야 한다. 하지만 비트코인 투자 손실이 50% 넘고 인플레이션 대처를 위한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어 채무 상환 능력을 의심받고 있다.
미국의 금리 인상 여파로 신흥국 국채 금리가 높아진 것도 위험 요인으로 분석된다. 이들 국가의 자금 조달 비용이 불어나기 때문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우크라이나(43.7%포인트) 엘살바도르(33.9%포인트) 아르헨티나(25%포인트) 파키스탄(17.7%포인트) 등 최소 6개 신흥국의 10년 만기 외화국채 금리가 연초 이후 10%포인트 이상 급등했다.
신흥국의 디폴트 시계가 빠르게 돌아가면서 세계 각국이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는 “세계 최대 채권국인 중국을 비롯해 주요 20개국(G20)이 신흥국의 부채 탕감 속도를 높이지 못하면 침체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계 주요 국가들은 코로나19, 인플레이션 등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빠듯해 신흥국 디폴트 문제는 테이블 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있다. 컨설팅 회사인 포드햄의 티나 포드햄 전략가는 FT에 “국가는 한 번에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데 주요 국가들은 모두 내부적으로 바쁜 상태”라고 말했다. FT는 “최근 G20 재무장관들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신흥국 디폴트 문제와 관련해 논의했지만 앞선 금융위기 때와 달리 공동 대응에 나서는 게 훨씬 어렵다는 점만 확인했다”고 전했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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