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차입금 작년보다 11% 급증…증가폭 역대 최대
대기업 회사채 잇단 미매각…CP 금리 13년 만에 최고
국내 기업이 1년 안에 갚아야 하는 단기차입금 규모가 사상 최대인 532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3일 정부가 50조원 이상의 유동성을 긴급 공급하기로 했지만 자금시장을 둘러싼 불안 요인은 여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24일 한국은행 자금순환표에 따르면 비금융기업의 단기차입금(단기대출금·단기채권)은 지난 6월 말 532조5193억원으로 역대 최대였다. 작년 말보다 54조3447억원(11.36%) 급증했다. 관련 통계를 작성한 2008년 이후 반기 기준으로 역대 최대 증가 폭이다. 세부적으로는 은행 대출 등 단기대출금이 490조3709억원, 회사채·기업어음(CP) 등 단기채권이 42조1484억원에 달했다.
기업들은 강원도 레고랜드의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부도 사태로 '초비상'이 걸렸다. 기관투자가들이 신용도가 우수한 대기업의 회사채마저 투자를 주저하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어서다. 이달 들어 한화솔루션 LG유플러스 한진 등이 잇달아 회사채 발행에 나섰지만 투자자를 찾지 못해 미매각 사태를 맞았다. 보수적인 자금 운용으로 잘 알려진 롯데그룹 계열사마저 자금줄이 꼬이는 상황에 처했다. 롯데건설은 단기차입금 상환에 어려움을 겪다 못해 그룹 계열사인 롯데케미칼로부터 7000억원의 자금을 긴급 수혈했다.
정부가 전날 50조원 이상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가동하기로 했지만 '돈맥경화'가 해소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많다. 미국 중앙은행(Fed)과 한국은행이 나란히 기준금리 인상을 예고한 상황이어서 시장 유동성이 갈수록 팍팍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기관투자가가 줄줄이 올해 채권 장부를 마감하고 투자를 접는 '북 클로징'에 나서는 점도 조달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
이날 단기자금 시장은 여전히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CP 금리(A1 등급, 91일물)는 전 거래일보다 0.12%포인트 오른 연 4.37%에 마감했다. 2009년 1월 20일(연 4.43%) 후 가장 높았다.
롯데건설은 요즘 매일 그룹 지주회사인 롯데지주에 자금 운용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 단기차입금 상환에 어려움을 겪는 등 자금줄이 꼬인 뒤부터다. 롯데그룹 계열사뿐만이 아니다. SK그룹 계열사인 SK에코플랜트, 효성그룹 계열사인 효성화학·효성중공업 등도 공모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지자 지난 8~9월 신용보증기금의 보증을 받아 겨우 자금을 조달했다. 정부가 뒤늦게 자금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기로 결정했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고 있다. 기업들의 단기차입금(만기 1년 미만)이 530조원을 웃돌고 있는 데다 경기 악화로 영업활동을 통한 현금흐름도 나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24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SK·롯데·효성·무림그룹 계열사들은 8~10월 신용보증기금의 프라이머리 채권담보부증권(P-CBO)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P-CBO는 신보 등이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의 회사채와 대출채권에 보증을 제공해 발행하는 증권이다. 중소기업이나 자금 사정이 열악한 기업이 즐겨 쓰는 자금조달 방식이다. 돈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던 대기업들이 P-CBO 발행에 나선 것은 그만큼 자금시장이 팍팍하다는 의미다.
효성화학(1000억원)을 비롯해 코리아세븐(900억원) 대우건설(800억원) 여천NCC(700억원) 풀무원식품(700억원) 휴비스(500억원) 롯데건설(300억원) 등은 8월 26일 P-CBO를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지난달 30일엔 효성중공업(700억원) SK에코플랜트(600억원) 다우데이타(500억원) 대우건설(200억원) 코리아세븐(100억원) 등이 P-CBO로 자금을 마련했다.
오는 27일에는 무림페이퍼(500억원) 코스맥스(200억원) 한신건영(150억원) 등이 P-CBO로 자금을 확충한다. LG그룹 농업화학 계열사인 팜한농, 코오롱인더스트리도 P-CBO를 통한 자금조달을 검토하고 있다.
롯데그룹 계열사들도 이달 들어 외부 자금조달이 쉽지 않았다. 롯데건설은 지난 20일 단기차입금 상환 등을 위해 계열사인 롯데케미칼로부터 5000억원을 긴급 조달한 데 이어 다음달 18일에는 2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한다. 레고랜드발(發) 후폭풍이 롯데를 비롯해 대기업에 '돈맥경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한 증권사 기업금융부문 임원은 "지난주 자금시장은 아주 긴박하게 돌아갔다"며 "롯데처럼 재무구조가 우수한 기업마저 자금줄이 꼬였다면 다른 회사들은 오죽했겠느냐"고 말했다.
정부는 자금시장이 냉각되자 기존 시장안정 조치에 더해 50조원 이상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가동한다고 23일 발표했다. 하지만 자금시장을 둘러싼 기업의 여건은 좋지 않다. 6월 말 기준 비금융기업의 단기차입금은 532조5193억원에 달했다. 시장금리가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차입금 차환(재조달) 여건도 나빠지고 있다. 3년 만기 'BBB-' 등급 회사채 평균 금리는 연 11%대로 두 자릿수를 유지하고 있다.
회사채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기업들의 대체 자금조달 통로로 부상한 은행 대출 금리는 나날이 치솟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예금은행의 8월 전체 기업대출 평균 금리(신규 취급액 기준)는 연 4.46%로, 전달보다 0.34%포인트 상승했다. 2014년 7월(연 4.54%) 후 8년1개월 만에 가장 높았다. 이달에는 연 5%대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업들의 벌이도 시원찮다. 3분기 실적 발표 시즌에 접어든 가운데 '어닝 쇼크'를 발표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삼성전자의 3분기 영업이익은 108조원으로 시장 컨센서스(증권사 추정치 평균)보다 9% 적었다. 포스코홀딩스도 3분기 9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내 컨센서스(1조4763억원) 대비 39.0% 밑돌았다. 국도화학은 컨센서스(480억원)에 비해 무려 72.85% 저조한 130억원의 영업이익을 발표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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