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핏에 손 벌렸지만…부채 눈덩이에 코로나19 低유가 '이중고'
'기업 사냥꾼' 칼 아이칸이 공격하기도
러시아 전쟁 이후 급반등한 유가에 '함박웃음'
2019년 4월 비키 홀럽이 자신의 전용기 걸프스트림V에 탑승했다. 행선지는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오마하. '오마하의 현인'이라 불리는 세계적인 투자 귀재 워런 버핏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비키 홀럽에겐 일분 일초가 아쉬운 시간이었다. 원하는 기업을 인수하기 위해 막대한 추가 자금이 필요했다. 해당 기업을 사려고 눈독들이던 거대 경쟁사가 이미 열흘 전 330억달러(약 44조원)에 달하는 가격을 제안한 마당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피인수기업의 가치는 막판 50억달러(약 7조원) 가량 치솟았다. 홀럽은 버핏의 지원 사격이 절실했다.
미국 정유기업 옥시덴탈페트롤리움(이하 옥시덴탈)의 최고경영자(CEO) 비키 홀럽의 얘기다. 2019년까지만 해도 미국 에너지업계에서 옥시덴탈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옥시덴탈이 셰일기업 아나다코페트롤리움(이하 아나다코)을 품겠다며 인수전에 뛰어들었을 때 모두가 비웃었다. 아나다코의 기업가치가 옥시덴탈보다 2배 이상 컸기 때문이다.
대기업 셰브론이 아나다코를 330억달러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홀럽은 조급해졌다. 오마하로 날아가 버핏을 만났다. 옥시덴탈에 100억달러를 투자해줄 것을 설득했다. 일주일여가 지나 버핏은 홀럽에게 100억달러 수표를 발행했다. 옥시덴탈 우선주 10만주를 받는 조건이었다.
버핏의 통큰 베팅 덕분에 옥시덴탈은 셰브론을 제치고 아나다코를 380억달러에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옥시덴탈이 입은 내상은 심각했다. 인수전으로 떠앉은 500억달러 가량의 부채더미를 해결해야 했다. 영업이익을 내서 빚을 갚으려면 기름값이 쭉쭉 올라야 했다. 그러 그해 말 시장에서 불길한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전 세계 경제를 충격에 빠트린 코로나19였다. 이듬해인 2020년 초 국제 유가는 옥시덴탈이 아나다코를 인수한 날보다 200% 가까이 폭락했다. 옥시덴탈 주가도 곤두박질쳤다. 회사는 파산 직전에 내몰렸다. 월가에선 비용을 고려하지 않은 홀럽의 무모함에 관한 질책이 쏟아졌다.
한 에너지업계 고위 임원은 "역사상 가장 바보같았던 거래"라고 조롱했다. '기업 사냥꾼'으로 유명한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도 "금융권 역사상 가장 최악의 재앙"이라고 비판하며 옥시덴탈 지분을 10% 가량 매입한 뒤 홀럽을 해임시키는 안건을 주도하기도 했다.
아나다코 인수로부터 4년이 흘렀다. 옥시덴탈은 파산 위기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급성장했다. 지난해 주가가 119% 급등하면서 S&P 500 기업 중 최고 성적표를 기록했다. 2020년 초 100억달러 밑으로 쪼그라들었던 회사의 시가총액은 540억달러 선을 회복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가스와 원유 가격이 폭등한 반사 이익을 톡톡히 누렸다는 평가다.
실적도 탄탄했다. 지난달 홀럽은 실적발표 회견에서 "옥시덴탈이 역사상 최고 실적을 거뒀다"고 밝혔다. 작년 연간 순이익은 125억달러를 넘겼다. 전년도 수치의 2배에 가깝다. 기존 부채 규모의 37%에 달하는 105억달러를 한번에 줄일 수 있었다. 아나다코 인수로 390억달러까지 치솟았던 옥시덴탈의 장기부채 규모는 작년 9월 이미 190억달러로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이제 옥시덴탈은 미국에서 내륙지역 유전 기준으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오일 및 가스 생산기업으로 올라섰다. 또 미국 셰일기업 가운데 시추 예정 유전을 가장 많이 보유한 것으로 조사됐다. 통상 에너지업계 분석가들은 시추 비용 상승 국면에서 '규모의 경제'를 중시한다. 옥시덴탈이 향후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컨설팅기업 엔베루스의 한 관계자는 "기업 운영에 있어서 종종 잘하는 것보다 운이 좋은 게 더 나을 때가 있다"며 "개전 이후 국제 유가 급등이라는 호재를 겪은 옥시덴탈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S&P글로벌 원자재 인사이츠의 관계자도 "이제 아나다코는 옥시덴탈의 부채를 해결해주는 현금인출기(ATM) 역할을 하고 있다. 아나다코 인수가 옥시덴탈에 신의 한수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홀럽은 최근 조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보조금 혜택을 받기 위해 탄소포집 사업에 10억달러를 투자하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남성 임원들이 주류로 자리잡고 있는 에너지업계에서 홀럽의 행보는 유독 바행(非行)으로 치부되곤 한다"고 꼬집었다.
4년 전 홀럽의 손을 잡아준 버핏은 옥시덴탈의 주요주주가 됐다. 버핏의 투자회사 벅셔해서웨이가 2019년 받은 우선주 외에도 20% 이상의 보통주를 사들이면서다. 미 증권사 에드워드존스의 한 분석가는 "버핏은 벅셔해서웨이의 포트폴리오에 담긴 다른 에너지·전력기업과 옥시덴탈의 향후 시너지를 계속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버핏은 홀럽을 정말 좋아한다. 홀럽이 최고의 CEO라고 생각할 정도"라고 분석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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