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인플레 다시 오르고 국채 위기 [정인설의 워싱턴나우]
미국 신용등급 하락이라는 변수가 갑자기 등장했습니다. 시점이 뜬금없었다는 점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국가채무에 대한 해묵은 이슈를 재부각시킨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인플레이션은 조금씩 둔화하고 있다고 모두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방향을 틀 기세입니다. 한동안 잠잠하다 들썩거리는 유가와 곡물가 때문입니다.
침체없이 인플레를 잡는 연착륙은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듯했습니다. 노동시장은 강하고 소비도 받쳐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수로 보면 침체 가능성은 여전합니다.
다시 찾아온 불청객을 중심으로 이번주 주요 일정을 정리하겠습니다.
지난주 가장 큰 뉴스는 미국 신용등급 강등이었습니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피치는 '8·2 쇼크'를 예상했을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2011년 8월 S&P가 미국 신용등급을 내렸을 때와 여러모로 대조적입니다. 그 때만 해도 글로벌 증시가 요동쳤습니다. S&P는 시장 충격을 고려해 금요일에 등급 강등 소식을 발표했습니다. 그럼에도 시장은 한 달 이상 발작을 했습니다. 당시 S&P 최고경영자(CEO)였던 데븐 샤마 이름을 따 '샤마 쇼크'로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피치의 CEO인 '폴 테일러'는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테일러 쇼크'도 '테일러 효과'도 없었습니다.
시점이 너무나도 이상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뒷북이었습니다. 미국의 국가부채가 부각되던 부채한도 협상이 한창이던 5월이 한참 지났기 때문입니다.
피치는 5월에 미국을 부정적 관찰 대상에 넣고 석달 뒤 등급을 내리는 일반적 수순을 밟았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기를 쓰고 비판하거나 철저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관심을 끌기 위해 이런 행동을 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피치는 그럼에도 '할 일을 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피치가 '관종'인 지 '투사'인 지 논란이 있지만 그래도 시사점이 있습니다. 미국의 고질병인 재정문제를 다시 한 번 건드린 점입니다. 알고도 안 고치는 무감각증에 다시 한 번 경종을 울렸다는 점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경고장은 금융시장을 향한 것이 아니라 국가재정을 향한 것입니다. 미국 경제가 아니라 미국 정치에 대한 일갈입니다. 긍정적으로만 보자면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 왜 계속 그러고 있느냐"는 외침입니다.
모든 건 결국 미국 국채로 귀결됩니다. 미국 빚의 증거물이자 결정체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국가부채가 늘어나면 미국 국채는 늘어난다는 얘기입니다. 미국의 3분기 차입 규모는 1조70억달러로 지난 5월 발표 때보다 2740억달러 늘었습니다.
'오비이락'일 수도 있지만 피치의 신용등급 강등이후 미국 국채 금리는 계속 올라갔습니다. 장기물을 중심으로 국채 가격이 떨어졌다는 겁니다. 공교롭게 미 재무부의 국채 발행 계획이 발표되면서 그렇게 됐다고 하지만 미국 국채는 사면초가 상황이긴 합니다.
발행 물량은 확 늘었는데 사 줄 사람은 줄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 중앙은행(Fed)은 가지고 있는 국채를 시장에 내놓는 양적긴축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손인 중국과 일본은 미 국채 물량을 줄이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이 그럴 태세입니다. 일본중앙은행은 최근 장기 국채 금리가 0.5%가 넘는 것을 용인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마이너스 금리인 일본 엔화로 상대적 고금리인 미국 국채 등에 투자하는 '엔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청산될 수 있습니다.
국제 유가와 곡물가가 고공행진을 하고 있습니다. 수요는 늘고 있는데 공급은 줄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기적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확전이 공급 감소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흑해 주변 항구로 전장이 확대되면서 원유와 곡물 공급에 차질을 빚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산유국들의 감산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유가와 곡물가 급등으로 미국 7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상승폭이 커질 전망입니다. 10일(현지시간) 나올 7월 헤드라인 CPI 상승률은 전년 동기대비 3.3%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6월의 3.0%보다 0.3%포인트 높습니다.
더 큰 관심은 근원물가입니다. 7월 근원 CPI 상승률은 4.7(블룸버그통신)~4.8%(월스트리트저널)로 전망됩니다. 전달 4.8%와 같거나 약간 낮다는 겁니다.
최근 희소식은 하락세로 전환한 중고차와 주거비입니다. 유가의 배신으로 기저효과가 사라진 빈자리를 정신 차린 탕아 같은 중고차와 주거비가 얼마나 채워줄 지 관심입니다. 상쇄가 된다면 증시는 안도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인플레 우려가 다시 커질 전망입니다. 금리선물시장에서 9월 인상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근원물가를 중심으로 인플레가 둔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하지만 주변을 보면 아직 불안한 점이 많습니다.
렌트비가 떨어진다고 하지만 아직 눈에 보일 정도는 아닙니다. 미국은 주별로 8월 초부터 신학기를 앞두고 '백 투 스쿨' 면세시즌(sales tax holidays)을 시작합니다. 학용품이나 전자제품을 살 때에 맞춰 한국으로 치면 부가가치세(판매세)를 면제해줍니다.
미국인들은 이번에도 여전히 물가가 너무 올랐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가 학부모 1500명을 조사한 결과 29%가 지난해에 비해 올해 "가격이 엄청나게 올랐다"고 답했습니다. 31%가 "매우 올랐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럼에도 올해 '백투더 스쿨' 면세 쇼핑액은 지난해보다 12.4% 늘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사상 최고치를 경신할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물가가 많이 올라도 미국인들은 소비할 여력이 된다는 얘기로 귀결됩니다.
미국은 연착륙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너무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골디락스'를 꿈꾸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미 중앙은행(Fed)은 인플레 대응을 너무 늦게 시작한 중죄를 탕감받게 됩니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은 인플레 시대 최대 영웅으로 등극합니다.
인플레가 둔화할 때까지 미국 경기가 잘 버텨주면 이런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국 노동시장과 소비를 보면 장밋빛 전망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미국 세수를 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미국 세수는 계속해서 줄고 있습니다. 소득세보다는 법인세 감소세가 더 가파릅니다. 개인보다 기업이 침체 사정권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 경제가 국내총생산(GDP)과 신규 일자리, 소비 등을 보면 좋지만 세수를 보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인플레는 분명 둔화하고 있습니다. 미 국채를 비롯해 주요 금리도 언젠가는 떨어질 것입니다. 미국 경제도 살아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여러 진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런 리스크를 잘 파악하고 있는 게 울퉁불퉁한 장애물을 넘어 종착역까지 안전하게 가는 첩경일 수 있습니다.
워싱턴=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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