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폴트 우려가 디폴트'…유럽 정크본드 투자심리 '꽁꽁'
고금리 장기화에 경기침체 우려…정크본드 금리 급등
유로화 표시 정크본드(투자부적격등급채권)에 대한 투자 위험이 7년 만에 최고치로 상승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23일 보도했다. 고금리 장기화에 경기 침체 우려가 겹치면서 기업들의 채무불이행(디폴트) 가능성이 급증한 탓이다.
보도에 따르면 채권 수익률 지표로 사용되는 ICE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지수로 측정한 유로화 표시 정크본드의 수익률과 국채 수익률 간 격차, 즉 ‘스프레드’가 18%포인트를 웃도는 수준까지 커졌다. 2016년 6월 이후 6년여만에 최대치다. 이 수치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줄파산 우려가 극에 달했던 2020년 중반에도 18%포인트를 넘어서지는 않았다.
정크본드는 투자 등급이 CCC 이하인 고위험‧고수익 회사채를 뜻한다. 채권 시장에서 정크본드와 국채 간 수익률 격차(스프레드)는 디폴트 위험의 가늠자로 여겨진다. 시장이 어려울수록 채권 투자자들이 디폴트 위험을 감수하고 정크본드를 매입하게 만들기 위한 프리미엄은 커지게 되기 때문이다.
지난 19일(현지시간) 미국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가 2007년 7월 이후 16년 만에 처음으로 연 5.0%를 돌파한 가운데 유럽 지역의 국채 금리도 상승세를 지속했다. 그러나 각국 중앙은행의 긴축 기조가 지속됨에 따라 회사채 금리가 국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치솟았다는 분석이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에 따르면 최근 몇 달 새 프랑스 유통업체 카지노귀샤드페라숑(Casino Guichard-Perrachon), 네덜란드의 가구 제조업체 케터(Keter), 벨기에의 배관 설비 업체 아이디얼(Ideal) 등 유럽 소재 기업 다수가 밀린 빚을 갚지 못해 연체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지역에서 스프레드가 가장 큰 채권은 프랑스의 대형 통신사 알티스(Altice)가 2027년 5월을 만기로 발행한 것으로, 지난달 말까지 26%포인트에 못 미치던 이 채권의 스프레드는 현재 28%포인트 위로 올라섰다.
전문가들은 전통적으로 유럽 회사채 시장의 유동성이 미국 대비 부족하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채권 수익률 변화가 급격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 회사채 시장에서도 스프레드가 확대되는 추세지만, 약 10%포인트 수준으로 유럽보다는 낮다. 유럽과 미국의 정크본드 시장 규모는 각각 4120억유로(약 590조 5000억원), 1조3000억달러(약 1756조3000억원)으로 추산된다.
스위스 자산운용사 본토벨의 크리스티안 한텔 회사채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유럽의 경제적 배경은 미국보다 확실히 더 나쁘다”며 “스프레드 확대는 경제 성장 둔화와 공격적인 금리 인상, 지속적인 인플레이션 수치 상승 등 종합적인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고 말했다.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의 토르스텐 슬뢰크 수석 이코노미스트도 “미국의 금융 시스템이 시장 기반인 반면 유럽은 은행 기반”이라며 “유럽의 신용 시장은 규모가 너무 작아서 (투자자들이) 갈 곳이 없다”고 분석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 분쟁으로 인한 리스크가 시장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 자산운용사 티로우프라이스의 안톤 도브로브스키 유로 정크본드 분석 전문가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부터 촉발된 (투자자들의) 위험 회피 심리가 유럽 신용 스프레드의 움직임을 증폭시켰을 수 있다”고 했다. 한텔 매니저 역시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는 시기에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건 신용 등급이 낮은 기업들”이라며 “이 정도의 스트레스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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