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리스크로 스태그플레이션 오나 - 주간 증시 전망
미국 2월 CPI와 유럽 통화정책회의 주목
이번 주는 '침묵의 시간'입니다. 적어도 주 초반까지 그렇습니다.
미 중앙은행(Fed)은 오는 15~16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 일주일 전부터 '블랙아웃'에 들어갔습니다. 한국에서도 9일 20대 대선을 앞두고 여론조사 결과를 공표할 수 없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치 국면도 소강상태입니다. 양국은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선 민간인 대피를 위해 불안한 휴전도 선언했습니다. 러시아는 서부전선에선 오판을 만회하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습니다.
시간은 러시아 편이 아니라는 걸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시가전이 장기전으로 갈수록 공격하는 쪽이 백전백패할 확률이 큽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레닌그라드(현 상트 페테르부르크) 전투와 스탈린그라드(볼고 그라드) 전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키이우(키예프)를 '푸틴그라드'로 만들고 싶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야욕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 세계가 경악한 푸틴의 핵도발이 또 언제 반복될 지 알 수 없습니다. 키이우와 하르키우(하리코프)에 폭격을 가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1999년 체첸사태 때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전과도 있어 불안함을 지울 수 없습니다.
푸틴의 일시적 침묵은 이래서 무서운 것 같습니다. 지금이 폭풍전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일시적 휴전, 불안한 휴전, 말로만 휴전입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장기전이 돼가고 있고 전쟁은 이제 상수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시적이라고 했던 인플레이션이 '위드 인플레'가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플레이션 지표도 침묵을 깨고 10일(미국 동부시간 오전 8시30분) 그 결과를 공개합니다. 2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푸틴의 핵전쟁 위협 등으로 폭등한 물가가 어느 정도 이 지표에 반영됐을 지가 관전포인트입니다. 앞서 9일엔 중국의 2월 생산자물가지수(PPI)와 소비자물가지수(CPI)가 공개됩니다.
유럽시간으로 10일엔 유럽중앙은행(ECB)이 기준금리를 결정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처음 열리는 ECB 통화정책회의입니다. 유럽이 코로나19발 인플레이션 대응과 푸틴발 경기침체 대책 중 무엇을 택일할 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정인설의 워싱턴나우'는 매주 월요일마다 유튜브 영상과 온라인 기사 등으로 알짜 정보를 전해주는 국내 최대 해외 투자정보 플랫폼 '한경 글로벌마켓'을 통해 찾아뵙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은 왜 '오합지졸'이 됐나
러시아는 지난달 24일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를 동시다발적으로 침공했습니다. 열흘 정도 지난 현재 상황은 러시아 예상과는 딴 판입니다.
파장이 엄청나긴 했지만 유럽 최대 규모 자포리자 원자력발전소를 장악하고 남부 항구도시 헤르손을 점령한 것 외에 뚜렷이 내세울만한 일이 없습니다. 우크라이나군이 안전을 염려해 원전 주변에서 교전을 포기했기 때문에 러시아가 원전을 쉽게 가져갔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에선 더디게라도 러시아가 체면을 살리고 있지만 키이우와 하르키우가 있는 서부와 북부에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특히 서부전선에 이상이 많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여러가지 분석이 있습니다.
첫째 러시아군의 특성 때문입니다. 러시아군은 정통 육군, 전통적인 보병 중심이 아닙니다. 좋게 얘기해 전차와 트럭으로 움직이는 기계화 보병 위주입니다. 시베리아 벌판 같은 곳에서 잘 싸우게 구성돼 있습니다. 각개격파식으로 걷고 뛰어 목표를 정복하는 시가전이나 고지전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선 러시아 전차가 달릴 수 있는 도로나 길목만 막고 있으면 키이우와 하르키우는 철옹성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노후화된 부실 장비 탓이라는 관측도 있습니다. 키이우 주변에 60㎞ 가량 길게 늘어선 러시아의 트럭과 전차의 행렬이 있습니다. 오래 되기도 했지만 관리를 잘하지 못해 1주일 이상 달리기 힘든 장비들이었습니다. 타이어가 찢어지고 엔진 고장이 나는 전차와 트럭이 부지기수였습니다.
러시아에서 오기 힘들고 벨라루스를 거쳐 가는 우크라이나 서부엔 전투력이 약한 초보병사들이 많이 투입됐다는 말이 있습니다. 포로나 소수민족, 10대 병사들이 단적인 예입니다. 이에 반해 러시아에서 가기 좋은 돈바스 지역이나 크름반도(크림반도) 쪽에 정예부대가 몰려 있다는 겁니다.
셋째는 잘 알려진 것처럼 우크라이나군의 방어력입니다. 결국 의지와 장비의 문제입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지지도가 보여주는 것처럼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똘똘 뭉쳐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유럽의 지원이 있습니다. 미국의 대전차 무기 재블린에 스웨덴산 대전차 무기가 들어왔습니다. 폴란드에서 미그기를 들여온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레닌·스탈린이 보여준 푸틴의 패배
역사상 최악의 시가전은 모두 옛 소련에서 있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레닌그라드 전투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과 옛 소련군이 맞붙었던 전투입니다. 둘 다 도시에서 발생한 시가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군이 그 도시를 포위하면서 벌인 사투였습니다.
지금 키이우와 하르키우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투 양상과 대동소이합니다.
두 전투는 언제 끝날 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 오래갔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942년 7월17일부터 1943년 2월2일까지 6개월간 지속됐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는 1943년 1월 18일부터 1944년 1월27일까지 872일간 이어졌습니다. 역사상 가장 길었던 최악의 시가전으로 남아있습니다.
후유증은 너무나 컸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선 200만명에 육박하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레닌그라드에선 400만명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도시로서 기능은 한동안 마비됐습니다.
두 전투에서 모두 공격을 했던 독일군이 모두 패배했습니다. 거리 하나하나를 샅샅이 점령할 수 없고 지하 같은 은신처를 모두 급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가전에서 공격자가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게 진리가 됐습니다. 물론 방어군이 싸울 의지와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을 때 성립할 수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군의 사기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직접적 파병 외에 서방세계에서 받을 수 있는 지원은 대부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키이우를 푸틴그라드로 바꾸고 싶은 푸틴의 욕심은 허상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예외없는 법칙은 없습니다. 게다가 예측불가의 대명사가 된 푸틴의 경우는 더 그렇습니다. 푸틴의 전과도 있습니다. 푸틴은 1999년 8월 총리로 임명된 뒤 같은해 12월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에 융단폭격을 가해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2016년 시리아 내전 당시에도 시리아 반군이 있던 시리아 동부 지역에 전략폭격기 등을 동원해 반군을 제압했습니다.
이번엔 어떨까요. 우크라이나에 친러정권을 세우려는 뜻을 이루려면 키이우를 폐허로 만들기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습니다. 하지만 핵 도발도 서슴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는 걸 보면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시한폭탄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푸틴발 인플레이션' 보여줄 2월 CPI
전쟁의 직접적 고통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겪고 있지만 세계인들도 신음하고 있습니다. 인플레이션 때문입니다.
지난 1주일은 끔찍한 인플레 주간이었습니다. 원자재와 농산물이 모두 주간 기준으로 사상 최대로 많이 올랐습니다.
세계 원자재 시장의 가격 지표인 S&P 골드만삭스 원자재지수(GSCI)는 지난주 20.3% 올랐습니다. 역대 가장 높은 주간 상승률입니다. 오일쇼크가 한창이던 1970년대를 넘어섰습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2월 세계식량가격지수는 140.7로 1년 전에 비해 20.7% 급등했습니다. 1996년 관련 지수를 집계한 이래 최고치입니다.
구체적으로 통계지표엔 어떻게 반영됐는 지는 10일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2월 CPI입니다. 1월에 전년 동기대비 7.5% 상승이었는데 월스트리트저널이 집계한 2월 CPI 전망치는 7.8%입니다. 블룸버그통신의 예상치는 7.9%입니다. 8%의 벽을 넘으면 시장은 요동칠 수 있습니다.
집과 차값이 많이 오르던 '홈플레이션'과 '카플레이션'에서 '오일플레이션'과 '애그플레이션' 시대로 확실히 바뀌었는 지 볼 수 있습니다. 푸틴발 인플레이션은 이제 시작이어서 앞으로가 더 걱정입니다.
◇인플레이션과 스태그플레이션 중 택일한다면
자원 부국인 러시아와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유례없는 공급부족(비용인상) 인플레이션 시대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유동성 과잉으로 촉발된 코로나19발 인플레이션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돈이 많이 풀려 생긴 수요초과(수요견인) 인플레이션은 시중자금을 흡수하면 됩니다. 금리를 올리고 긴축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그래서 중앙은행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공급부족 인플레이션은 다릅니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큰 변수가 되지 못합니다. 다만 공급부족은 결과적으로 경기침체를 불러올 수 있어 그걸 예방하는 조치는 해야 합니다. 금리를 너무 빠르게 올리면 부작용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긴축의 완급조절이 필요합니다.
결국 처방 측면에서 보자면 코로나19발 인플레와 푸틴발 인플레는 상충됩니다. 전자는 금리를 올려야 하고 후자는 금리를 천천히 올리거나 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려야 합니다. 아니면 하나를 선택하고 버려진 다른 하나 때문에 일어날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파월의 1차 선택은 간명했습니다. 지난주 의회 발언에서 "16일 FOMC 때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리는 걸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빅스텝'으로 0.5%포인트 인상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베이비 스텝'으로 가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인플레이션은 어느 정도 감내하고 전쟁으로 인한 불확실성을 잘 챙겨보겠다는 얘기였습니다. 물론 푸틴발 핵공포가 장기화하면 경기 침체와 물가상승을 함께 겪어야 하는 스태그플레이션까지 각오해야 합니다. 전쟁 중인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지난주 자국 화폐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금리를 대폭 인상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회의를 열 상황도 되지 않아 통화정책회의를 연기했습니다.
유럽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ECB는 10일 통화정책회의를 열어 기준금리를 결정합니다. 원래 시간표 상에도 ECB의 금리인상은 시기상조입니다. 다만 단계적으로 채권매입을 줄이고 긴축 쪽으로 전환하려는 매파적 발언을 내놓을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지난달 통화정책회의에서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총재는올해 금리가 오를 가능성은 "매우 낮다(very unlikely)"라는 표현을 더 이상 쓰지 않았습니다. 금리인상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정보에 기반한 결정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푸틴이 ECB의 '긴축 시간표'를 흐트려 놓았습니다.
푸틴발 핵 공포가 허언이거나 망상에 가깝다면 이 시간표는 예정대로 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벌써 유럽 증시가 푸틴발 핵 공포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역시 세계 경제에 상당 부분 편입돼 있기 때문에 타격이 큽니다. 장기 난타전으로 가는 건 공멸의 길로 빠져드는 것과 같습니다.
'침묵의 시간'에서 하루 빨리 출구전략을 찾아 현재의 인플레이션이 스태그플레이션으로까지 비화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워싱턴=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
미국 2월 CPI와 유럽 통화정책회의 주목
이번 주는 '침묵의 시간'입니다. 적어도 주 초반까지 그렇습니다.
미 중앙은행(Fed)은 오는 15~16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 일주일 전부터 '블랙아웃'에 들어갔습니다. 한국에서도 9일 20대 대선을 앞두고 여론조사 결과를 공표할 수 없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대치 국면도 소강상태입니다. 양국은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선 민간인 대피를 위해 불안한 휴전도 선언했습니다. 러시아는 서부전선에선 오판을 만회하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습니다.
시간은 러시아 편이 아니라는 걸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시가전이 장기전으로 갈수록 공격하는 쪽이 백전백패할 확률이 큽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레닌그라드(현 상트 페테르부르크) 전투와 스탈린그라드(볼고 그라드) 전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지만 키이우(키예프)를 '푸틴그라드'로 만들고 싶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야욕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 세계가 경악한 푸틴의 핵도발이 또 언제 반복될 지 알 수 없습니다. 키이우와 하르키우(하리코프)에 폭격을 가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1999년 체첸사태 때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전과도 있어 불안함을 지울 수 없습니다.
푸틴의 일시적 침묵은 이래서 무서운 것 같습니다. 지금이 폭풍전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일시적 휴전, 불안한 휴전, 말로만 휴전입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장기전이 돼가고 있고 전쟁은 이제 상수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시적이라고 했던 인플레이션이 '위드 인플레'가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플레이션 지표도 침묵을 깨고 10일(미국 동부시간 오전 8시30분) 그 결과를 공개합니다. 2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입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푸틴의 핵전쟁 위협 등으로 폭등한 물가가 어느 정도 이 지표에 반영됐을 지가 관전포인트입니다. 앞서 9일엔 중국의 2월 생산자물가지수(PPI)와 소비자물가지수(CPI)가 공개됩니다.
유럽시간으로 10일엔 유럽중앙은행(ECB)이 기준금리를 결정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처음 열리는 ECB 통화정책회의입니다. 유럽이 코로나19발 인플레이션 대응과 푸틴발 경기침체 대책 중 무엇을 택일할 지 지켜봐야겠습니다.
'정인설의 워싱턴나우'는 매주 월요일마다 유튜브 영상과 온라인 기사 등으로 알짜 정보를 전해주는 국내 최대 해외 투자정보 플랫폼 '한경 글로벌마켓'을 통해 찾아뵙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은 왜 '오합지졸'이 됐나
러시아는 지난달 24일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를 동시다발적으로 침공했습니다. 열흘 정도 지난 현재 상황은 러시아 예상과는 딴 판입니다.
파장이 엄청나긴 했지만 유럽 최대 규모 자포리자 원자력발전소를 장악하고 남부 항구도시 헤르손을 점령한 것 외에 뚜렷이 내세울만한 일이 없습니다. 우크라이나군이 안전을 염려해 원전 주변에서 교전을 포기했기 때문에 러시아가 원전을 쉽게 가져갔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에선 더디게라도 러시아가 체면을 살리고 있지만 키이우와 하르키우가 있는 서부와 북부에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특히 서부전선에 이상이 많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여러가지 분석이 있습니다.
첫째 러시아군의 특성 때문입니다. 러시아군은 정통 육군, 전통적인 보병 중심이 아닙니다. 좋게 얘기해 전차와 트럭으로 움직이는 기계화 보병 위주입니다. 시베리아 벌판 같은 곳에서 잘 싸우게 구성돼 있습니다. 각개격파식으로 걷고 뛰어 목표를 정복하는 시가전이나 고지전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선 러시아 전차가 달릴 수 있는 도로나 길목만 막고 있으면 키이우와 하르키우는 철옹성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노후화된 부실 장비 탓이라는 관측도 있습니다. 키이우 주변에 60㎞ 가량 길게 늘어선 러시아의 트럭과 전차의 행렬이 있습니다. 오래 되기도 했지만 관리를 잘하지 못해 1주일 이상 달리기 힘든 장비들이었습니다. 타이어가 찢어지고 엔진 고장이 나는 전차와 트럭이 부지기수였습니다.
러시아에서 오기 힘들고 벨라루스를 거쳐 가는 우크라이나 서부엔 전투력이 약한 초보병사들이 많이 투입됐다는 말이 있습니다. 포로나 소수민족, 10대 병사들이 단적인 예입니다. 이에 반해 러시아에서 가기 좋은 돈바스 지역이나 크름반도(크림반도) 쪽에 정예부대가 몰려 있다는 겁니다.
셋째는 잘 알려진 것처럼 우크라이나군의 방어력입니다. 결국 의지와 장비의 문제입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지지도가 보여주는 것처럼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똘똘 뭉쳐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유럽의 지원이 있습니다. 미국의 대전차 무기 재블린에 스웨덴산 대전차 무기가 들어왔습니다. 폴란드에서 미그기를 들여온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레닌·스탈린이 보여준 푸틴의 패배
역사상 최악의 시가전은 모두 옛 소련에서 있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레닌그라드 전투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과 옛 소련군이 맞붙었던 전투입니다. 둘 다 도시에서 발생한 시가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군이 그 도시를 포위하면서 벌인 사투였습니다.
지금 키이우와 하르키우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투 양상과 대동소이합니다.
두 전투는 언제 끝날 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 오래갔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942년 7월17일부터 1943년 2월2일까지 6개월간 지속됐습니다. 레닌그라드 전투는 1943년 1월 18일부터 1944년 1월27일까지 872일간 이어졌습니다. 역사상 가장 길었던 최악의 시가전으로 남아있습니다.
후유증은 너무나 컸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선 200만명에 육박하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레닌그라드에선 400만명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도시로서 기능은 한동안 마비됐습니다.
두 전투에서 모두 공격을 했던 독일군이 모두 패배했습니다. 거리 하나하나를 샅샅이 점령할 수 없고 지하 같은 은신처를 모두 급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가전에서 공격자가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게 진리가 됐습니다. 물론 방어군이 싸울 의지와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을 때 성립할 수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군의 사기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직접적 파병 외에 서방세계에서 받을 수 있는 지원은 대부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키이우를 푸틴그라드로 바꾸고 싶은 푸틴의 욕심은 허상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예외없는 법칙은 없습니다. 게다가 예측불가의 대명사가 된 푸틴의 경우는 더 그렇습니다. 푸틴의 전과도 있습니다. 푸틴은 1999년 8월 총리로 임명된 뒤 같은해 12월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에 융단폭격을 가해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2016년 시리아 내전 당시에도 시리아 반군이 있던 시리아 동부 지역에 전략폭격기 등을 동원해 반군을 제압했습니다.
이번엔 어떨까요. 우크라이나에 친러정권을 세우려는 뜻을 이루려면 키이우를 폐허로 만들기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습니다. 하지만 핵 도발도 서슴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는 걸 보면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시한폭탄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푸틴발 인플레이션' 보여줄 2월 CPI
전쟁의 직접적 고통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겪고 있지만 세계인들도 신음하고 있습니다. 인플레이션 때문입니다.
지난 1주일은 끔찍한 인플레 주간이었습니다. 원자재와 농산물이 모두 주간 기준으로 사상 최대로 많이 올랐습니다.
세계 원자재 시장의 가격 지표인 S&P 골드만삭스 원자재지수(GSCI)는 지난주 20.3% 올랐습니다. 역대 가장 높은 주간 상승률입니다. 오일쇼크가 한창이던 1970년대를 넘어섰습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2월 세계식량가격지수는 140.7로 1년 전에 비해 20.7% 급등했습니다. 1996년 관련 지수를 집계한 이래 최고치입니다.
구체적으로 통계지표엔 어떻게 반영됐는 지는 10일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2월 CPI입니다. 1월에 전년 동기대비 7.5% 상승이었는데 월스트리트저널이 집계한 2월 CPI 전망치는 7.8%입니다. 블룸버그통신의 예상치는 7.9%입니다. 8%의 벽을 넘으면 시장은 요동칠 수 있습니다.
집과 차값이 많이 오르던 '홈플레이션'과 '카플레이션'에서 '오일플레이션'과 '애그플레이션' 시대로 확실히 바뀌었는 지 볼 수 있습니다. 푸틴발 인플레이션은 이제 시작이어서 앞으로가 더 걱정입니다.
◇인플레이션과 스태그플레이션 중 택일한다면
자원 부국인 러시아와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유례없는 공급부족(비용인상) 인플레이션 시대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유동성 과잉으로 촉발된 코로나19발 인플레이션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돈이 많이 풀려 생긴 수요초과(수요견인) 인플레이션은 시중자금을 흡수하면 됩니다. 금리를 올리고 긴축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그래서 중앙은행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공급부족 인플레이션은 다릅니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 큰 변수가 되지 못합니다. 다만 공급부족은 결과적으로 경기침체를 불러올 수 있어 그걸 예방하는 조치는 해야 합니다. 금리를 너무 빠르게 올리면 부작용이 크다는 얘기입니다. 긴축의 완급조절이 필요합니다.
결국 처방 측면에서 보자면 코로나19발 인플레와 푸틴발 인플레는 상충됩니다. 전자는 금리를 올려야 하고 후자는 금리를 천천히 올리거나 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려야 합니다. 아니면 하나를 선택하고 버려진 다른 하나 때문에 일어날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파월의 1차 선택은 간명했습니다. 지난주 의회 발언에서 "16일 FOMC 때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리는 걸 지지한다"고 밝혔습니다. '빅스텝'으로 0.5%포인트 인상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베이비 스텝'으로 가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인플레이션은 어느 정도 감내하고 전쟁으로 인한 불확실성을 잘 챙겨보겠다는 얘기였습니다. 물론 푸틴발 핵공포가 장기화하면 경기 침체와 물가상승을 함께 겪어야 하는 스태그플레이션까지 각오해야 합니다. 전쟁 중인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지난주 자국 화폐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금리를 대폭 인상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회의를 열 상황도 되지 않아 통화정책회의를 연기했습니다.
유럽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ECB는 10일 통화정책회의를 열어 기준금리를 결정합니다. 원래 시간표 상에도 ECB의 금리인상은 시기상조입니다. 다만 단계적으로 채권매입을 줄이고 긴축 쪽으로 전환하려는 매파적 발언을 내놓을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지난달 통화정책회의에서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총재는올해 금리가 오를 가능성은 "매우 낮다(very unlikely)"라는 표현을 더 이상 쓰지 않았습니다. 금리인상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정보에 기반한 결정을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푸틴이 ECB의 '긴축 시간표'를 흐트려 놓았습니다.
푸틴발 핵 공포가 허언이거나 망상에 가깝다면 이 시간표는 예정대로 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벌써 유럽 증시가 푸틴발 핵 공포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역시 세계 경제에 상당 부분 편입돼 있기 때문에 타격이 큽니다. 장기 난타전으로 가는 건 공멸의 길로 빠져드는 것과 같습니다.
'침묵의 시간'에서 하루 빨리 출구전략을 찾아 현재의 인플레이션이 스태그플레이션으로까지 비화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워싱턴=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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