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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중앙화 없는 '탈중앙금융'…암호화폐 어디로 갈까 [빈난새의 한입금융]

기사출처
블루밍비트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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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탈중앙화" 내걸고 등장한 비트코인
몸집 커질수록 '탈중앙화 허상' 딜레마
디파이 생태계 소수가 좌지우지
개인의 암호화폐 통제권도 흔들



"비트코인은 중앙 서버나 신뢰 기관 없이 완전히 탈중앙화(completely decentralized)되어 있다. 모든 것이 신뢰가 아닌 (개인의) 암호화된 검증 작업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비트코인 창시자로 알려진 나카모토 사토시는 2009년 2월 'P2P 파운데이션'이라는 웹사이트 게시판에 비트코인을 소개하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핵심은 '완전한 탈중앙화'입니다.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이를 수습하기 위한 미국 중앙은행(Fed)의 양적완화를 지켜본 사토시는 전통 화폐의 문제를 중앙화된 신뢰 시스템에서 찾았습니다. 경제 위기를 이유로 돈을 무한정 찍어내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중앙은행이나, 개인이 맡긴 돈으로 막대한 신용 버블을 일으키는 은행은 전통 화폐 시스템의 핵심인 '제3의 신뢰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한다는 논리였죠.

<사진=P2P파운데이션 웹사이트 캡처>


이런 중앙화된 신뢰 기관도, 중간 개입자도, 중간 개입자에게 지불해야 하는 수수료도 없앤 비트코인이 탄생한 배경입니다. 비트코인은 거래를 검증하는 수많은 익명의 개인과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장부(공개 분산 원장)를 기반으로 거래가 이뤄집니다. 개인간 거래와 개인이 보유한 비트코인에 대한 소유권은 조작될 수도, 그 누구도 개입할 수 없다는 점은 탈중앙화가 핵심인 암호화폐 지지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원칙입니다.


비트코인이 시작한 '탈중앙화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암호화폐는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암호화폐거래소에서 거래되고 있는 암호화폐는 1만3000개가 넘습니다. 전체 암호화폐 시가총액은 1조달러에 이르고요. 하지만 암호화폐의 세계가 이렇게 방대해질수록 그 기본 전제였던 탈중앙화는 점점 허상이 되고 있습니다.

디파이라면서...의사결정 소수독점

국제결제은행(BIS)은 지난달 펴낸 연례 보고서에 암호화폐와 디파이(DeFi·탈중앙화 금융 서비스) 관련 분석을 담은 챕터를 수록하고 "디파이 생태계는 그 이름과는 모순적으로 중앙화되는 경향을 나타낸다"며 "탈중앙화의 허상"이라고 꼬집었습니다.


BIS의 지적은 이렇습니다. 디파이 생태계는 중요한 결정을 '거버넌스 토큰' 보유자들의 투표로 결정하는 일이 많습니다. 거버넌스 토큰은 말 그대로 해당 블록체인 생태계에서 의결권을 행사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는 토큰입니다. 1토큰=1표의 민주주의적인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한다는 취지지만, 실제로는 개발팀과 초기 투자자, 소수의 검증인 등 이해관계자의 보유량이 많습니다. 이들이 주요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구조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테라USD·루나 사태 때도 이런 일이 벌어졌었죠. 테라 루나 대폭락 이후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는 개인 투자자들의 압도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테라를 발행하는 내용의 거버넌스 제안을 투표에 부쳤습니다. 테라 리서치 포럼의 개발자와 개인 투자자들이 참여한 사전 투표에서는 92%가 반대했지만, 정작 실제 투표에선 66%의 찬성률로 안건이 통과됐습니다. 루나 보유량이 많은 소수 이해관계자와 검증인을 중심으로 투표가 진행됐기 때문입니다.

솔렌드가 보여준 디파이의 현실과 딜레마

효율적인 거래와 의사결정을 명목으로 탈중앙화 원칙을 깨는 일도 적지않게 일어납니다. 지난달에는 솔라나 블록체인 기반 디파이 플랫폼인 솔렌드가 논란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솔라나 코인은 암호화폐 시가총액 9위 규모의 알트코인입니다.




지난달 19일의 일입니다. 암호화폐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솔라나 코인 가격이 급락하자 솔렌드는 개발사가 특정 사용자 지갑에 접근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자는 제안을 투표에 부쳤습니다. 대규모 강제 청산이 발생해 솔라나 블록체인 생태계가 붕괴되는 것을 막으려면, 익명의 고래(큰손) 투자자의 지갑에 있는 자산을 개발사가 직접 장외 거래를 통해 정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문제의 고래 투자자는 솔렌드의 솔라나 풀에 예치된 전체 자산의 95%에 해당하는 570만 솔라나를 담보로 넣어두고 있었습니다. 솔라나 가격 급락이 이어질 경우 이중 20%에 해당하는 2100만달러어치의 솔라나가 강제 청산될 수 있는 상태였죠.


투표는 1.19%란 낮은 참여율에도 불구하고 거버넌스 토큰 보유자들이 97.5%의 높은 찬성률을 보이며 빠르게 통과됐습니다. 의결정족수가 1%에 불과했거든요. 특히 어느 한 계정이 70만달러를 내고 추가 의결권을 획득, 찬성표를 던지면서 정족수를 사실상 혼자 채웠습니다.


크립토 판은 들끓었습니다. 개발사에게 개인 자산에 대한 통제권을 준 것은 탈중앙화 원칙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암호화폐 리서치 회사 델파이디지털의 법률 고문 가브리엘 샤피로는 "디파이의 철학에 완전히 반할 뿐 아니라 불법적인 행위"라고 꼬집었습니다.


블록체인 전문매체 코인텔레그래프는 "솔렌드가 고래의 지갑을 통제한다면 솔라나 블록체인 생태계를 구할 순 있겠지만, 개발사가 특정 사용자의 자산을 몰수할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주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논란과 비판이 이어지자 결국 솔렌드는 하루만에 계획을 철회했습니다. 하지만 이 짧은 촌극은 디파이 서비스들이 처한 딜레마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됐습니다.

코인거래 99%는 중앙화된 거래소에서

암호화폐거래소도 탈중앙화의 허상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입니다. BIS는 "투자자들은 탈중앙화거래소(DEX) 대신 중앙화된 거래소(CEX)에 대부분의 거래를 의존하고 있다"며 "CEX에 거래가 몰리는 것은 시장의 집중화를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DEX는 중앙 집중식 중개자 없이 개인끼리 거래할 수 있는 곳입니다. 탈중앙화의 내러티브에는 더 잘 들어맞지만, 거래 규모는 CEX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BIS 분석에 따르면 최근 1년간 바이낸스 코인베이스 등 글로벌 대형 거래소 세 곳에서 매주 발생한 암호화폐 거래량은 평균 2002억달러였습니다. 반면 DEX는 매주 평균 거래량이 10억달러에 그쳤습니다.




CEX는 신속한 거래를 위해 트레이더들이 호가창을 보고 거래소에 제출하는 주문을 오프체인에서 기록·처리합니다. 전통적인 증권거래소와 거의 비슷한 방식이죠. 블록체인에 직접 거래를 기록하는 온체인과 달리 합의 과정이나 검증이 필요 없다 보니 거래 속도는 빠르지만, 해킹과 정보 위·변조 등의 위험이 상존합니다. 중앙화된 금융 시스템의 위험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엄격한 규제를 받는 전통 금융기관과 달리 이런 CEX는 규제 공백 상태여서 사고가 터지면 소비자 피해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재무제표상 부채로 표시되는 이용자 자산과 부외자산을 제대로 구분해 공시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여서 이용자 자산을 다른 곳에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리스크 관리는 제대로 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용자가 예치한 암호화폐에 대한 통제권을 중앙화된 중개인이 쥘 수 있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미국 최대 코인거래소인 코인베이스는 올 3월말 공시한 분기 보고서에서 "거래소가 파산하면 이용자가 예치한 암호화폐도 파산 절차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명시해 투자자와 시장에 충격을 안겼습니다. 경제 전문 매체 포춘은 "개인의 암호화폐에 대한 소유권은 절대 불변이라는 게 블록체인 지지자들의 핵심 ‘셀링 포인트’인데, 코인베이스에선 그 통제권을 넘겨줘야 한다는 얘기"라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최근 파산한 미국의 암호화폐 대출업체 셀시우스도 "170만 이용자가 플랫폼에 맡긴 암호화폐의 소유권은 셀시우스에 있다"고 주장하는 중입니다. 이용자들이 가입할 때 동의했을 약관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다면서 말이죠.

아직까진 빛 좋은 개살구...어떻게 실현할까

탈중앙화의 철학은 암호화폐와 블록체인 기술의 주춧돌입니다. 전통 금융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서도 앞으로 더 갈고 닦아야 할 가치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사토시가 내건 탈중앙화의 가치에 공감하지 않았다면 비트코인이 이렇게 성장할 수 없었을 겁니다.


금융만의 얘기가 아닙니다. 최근 탈중앙화 자율조직(DAO)은 암호화폐 산업의 테두리를 벗어나 미술 작품 수집·유통, 작곡 커뮤니티, 제약 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즘 테크 업계의 뜨거운 감자인 차세대 인터넷 환경 '웹 3.0'도 탈중앙화가 핵심이죠.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수많은 암호화폐 시장 참여자들이 보여준 모습만 놓고 보면 탈중앙화란 말 자체는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아 보입니다. 탈중앙화가 그 가치를 유지하면서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과연 가능하긴 할지 본질적 고민이 필요한 때 같습니다.


빈난새 기자 binther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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