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끌'해서 산 8000만원짜리 파텍필립 시계가 5년 뒤에 10배가 올라 8억원이 되더라고요. 이런 현물도 잘 다듬으면 훌륭한 금융상품이 될 수 있겠다 싶었죠."
신범준 바이셀스탠다드 대표(사진)는 한경 긱스와 만나 "조각 투자, 나아가 증권형토큰(STO)이 곧 제도권에 편입되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투자 세계가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바이셀스탠다드는 조각 투자 플랫폼인 '피스' 운영사다. 조각 투자는 개인이 구입하기 어려운 자산의 지분을 작은 단위로 쪼개거나 주식 등으로 유동화한 뒤 여러 명이 나눠 갖는 형태의 투자법을 말한다.
피스는 지난해 4월 출시됐다. 명품 시계나 미술품과 같은 예술 작품에 조각 투자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회사가 현물 자산을 매입한 뒤 조각소유권을 투자자에게 판매하고, 현물 자산을 회사의 명품 거래 플랫폼인 '모노리치'에 이관해 재판매한 뒤 수익금을 나누는 구조다. 투자자들이 수익금을 분배받기까지는 통상 6개월~1년이 걸린다.
회사가 플랫폼 출시 직후 내놓은 롤렉스 시계 11종의 조각소유권은 30분 만에 완판됐다. 이는 6개월 뒤 매각되면서 시세 차익을 통해 32%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또 지난해 9월엔 데이비드 호크니 작품의 조각소유권을 판매하기도 했다.
국회의원 보좌관에서 스타트업으로
창업자인 신 대표는 국민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고 싶었다. 처음엔 잡지사에 들어가 기자로 일했다. 글을 써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후엔 전공을 살려 정계에 입문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국회의원 보좌관이 됐다. 스타급 의원을 보좌하면서 커리어를 쌓았다. 그가 보좌했던 의원 중에선 당 원내대표를 맡은 인물도, 지방자치단체장을을 맡은 인물도 있다.
신 대표는 "보좌관 면접장에선 기자 출신인 점을 활용해 국회의원이 가져야 할 태도, 화법, SNS 전략 등을 담은 100페이지짜리 매거진을 만들어 의원 앞에 선보이기도 했다"며 "어떤 상황을 마주하면 돌파하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드는 집중력을 가진 게 명문대 출신 지원자들을 제친 비결이 아닐까 싶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국회에서 마주한 정치인의 삶은 상상과 달랐다. 개별적으로 보면 똑똑한 사람들도 정치라는 헤게모니 안에선 우매하고 아둔해보인다는 게 그의 회상이다. 보좌진들 역시 각자의 꿈을 펼치기보단 월급쟁이의 삶에 만족하는 '생활형 보좌관'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는 "나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빨리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어 사회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다 기자 시절 알던 선배의 추천으로 스타트업 업계에 뛰어들었다. 워커홀릭 기질이 있던 신 대표에게 스타트업은 일하기 '딱 좋은' 직장이었다. 주말에도 빠짐없이 출근해 일했다. 자신의 노력이 회사의 성장으로 고스란히 이어지는 구조가 체감됐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이 때 스타트업에 '중독'됐다.
피봇 이후 82억원 투자받은 플랫폼 된 피스
이제는 스스로 아이템을 찾아 창업을 하고 싶었다. 처음 시작한 건 노인 전문 일자리 매칭 플랫폼인 '파파잡'이었다. 스마트폰 사용에 익숙지 않은 노인들이 앱 안에서 손쉽게 이력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기존 온라인에서 40단계 넘는 절차를 거처야 했던 이력서 작성 과정을 12단계까지 줄였다. 일자리 창출에 기여한다는 점을 인정받아 기술보증기금의 예비창업패키지에도 선정됐다.
하지만 시장 데뷔를 앞두고 코로나19가 터졌다. 신 대표는 "팬데믹 상황에서 청년들의 일자리도 모두 사라지고 있는데, 창업하겠답시고 시니어 일자리 플랫폼을 들고 오면 사람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봤겠나"라며 "망연자실했지만 먹고 살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고 말했다.
피봇을 결심했다. 어린 시절부터 물건을 수집하는 걸 좋아했다. 컵부터 조명, 의자, 와인, 시계에 이르기까지 가치있는 무언가를 모으는 게 그의 취미였다. 진짜 예쁘고 가치있는 물건들은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가치가 뛰는 걸 발견했다. 평소 투자에 '진심'이던 성격도 한몫했다. '이보다 더 좋은 금융상품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등장한 플랫폼이 피스다. 직접 생각한 아이디어가 시장에서 통하는지 보기 위해 첫 상품을 내놨다. 완판 행진이었다. 처음에 30분 만에 매진된 첫 상품인 롤렉스 시계 포트폴리오는 입소문을 탄 뒤 이후 내놓은 포트폴리오에선 47초, 45초 등 1분 이내에 완판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지금까지 누적 거래액은 약 40억원, 회원 수는 3만명 수준이다. 이용자 1명당 평균 300만원 안팎을 투자해 약 30% 정도의 수익률을 거뒀다. 아직 시리즈A 라운드를 열기 전이지만 시드, 프리A, 브릿지 라운드 등을 통해 누적 82억원의 투자금도 유치했다. KB인베스트먼트, 하나벤처스 등이 회사에 러브콜을 보냈다.
동산신탁사로 발돋움 목표
바이셀스탠다드는 조각 투자의 범위를 선박금융 같은 인프라 자산으로도 넓힐 계획이다. 선박금융은 선박의 건조나 매매, 임대차 등 거래를 위해 금융기관이 해운회사와 조선사에 제공하는 금융 서비스다. 지난달 KDB인프라자산운용, NH투자증권, 한국해양대 등과 STO를 활용한 선박금융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덩치가 커 민간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던 선박금융 분야에 블록체인 기반의 STO를 접목시켜 조각 투자가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국내에선 최초다.
신 대표는 "직원들이 이 분야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해양대 대학원에 입학까지 하면서 준비했다"며 "일종의 '그들만의 리그'로 여겨졌던 대체투자 영역을 STO를 통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오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빅테크들이 가상 자산과 인프라 투자 기반을 바탕으로 금융 산업에 뛰어들 것으로 보이는데, 피스는 이 시장을 선제적으로 파고들고자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내 최초의 동산신탁사로 자리매김하는 게 목표다. 부동산과는 달리 명품이나 미술품 같은 현물은 등기가 되지 않아 신탁 상품이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이미 '한국동산신탁'이라는 상표명도 등록해 둔 상태다. 그는 "스니커즈도 1억원짜리가 거래될 만큼 누군가에겐 소중한 자산"이라며 "피스는 STO를 기반으로 동산 전문 신탁사로 발돋움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 대표는 확고한 경영 철학을 내세웠다. 직원 수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이 되고 난 뒤에도 100명 미만의 인력으로 회사를 운영할 예정이다. 대체 불가능한 영역은 최대한 우수한 인재를 모시되, 대체가 가능한 영역은 아웃소싱으로 운영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한 번 들어온 사람은 다시 나가기 어려울 만큼 확실한 처우를 보장하는 게 철학"이라고 했다.
그 대신 인력을 뽑을 땐 '나보다 잘난 사람'을 채용한다고 했다. 항상 배울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임원진에게도 면접 시 '당신보다 못한 사람'은 뽑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고 설명했다.
참, 한가지 더
잘나가는 조각투자 플랫폼... 어디어디 있나
지난해부터 조각투자 플랫폼이 각광받으면서 다양한 형태의 스타트업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벤처투자금도 잇달아 유치했다.
음악 저작권을 주식처럼 '주'단위로 쪼개 사고 팔 수 있게 하는 뮤직카우는 기업공개(IPO)를 앞두고 있다. 몸값도 크게 올라 유니콘 기업 등극을 눈앞에 둔 상태다.
조각 투자 플랫폼 '아트앤가이드' 운영사 열매컴퍼니 역시 IPO 준비 절차에 착수했다. 이 회사는 이중섭, 김환기, 이우환, 피카소 등 국내외 유명 작가의 작품을 소유권 분할을 통해 소액 형태로 판매한다. 작품을 공동 매입한 뒤 가격이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웃돈을 붙여 매각하고 차익을 투자자들에게 배분하는 식이다. 올 상반기 소프트뱅크벤처스, KT인베스트먼트 등으로부터 170억원 규모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다.
또 미술품 조각 투자 플랫폼 테사는 아티스트의 작품을 최소 1000원 단위부터 조각 투자할 수 있는 서비스를 내놨다. 지난해 52억원 규모 시리즈A 투자를 받은 데 이어 지금은 브릿지 라운드 펀딩이 진행되고 있다.
그밖에 부동산에 조각 투자할 수 있는 플랫폼 '카사'나, 송아지를 키워 경매에 붙인 뒤 차익을 얻는 한우 조각투자 플랫폼 '뱅카우', 와인을 쪼개 사는 '트레져러', 영화나 웹툰 같은 콘텐츠에 투자하는 '펀더풀' 등도 있다.
김종우 기자 jongw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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