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여의도 증권가는 토큰증권(STO) 때문에 뜨겁다. 그동안 국내 금융사들은 블록체인 위에서 토큰 형태로 발행한 증권의 발행과 유통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었는데, 이제 금융당국의 STO 규제 가이드라인이 나옴에 따라 이 분야에 합법적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증권과 화폐의 토큰화는 향후 몇 년 동안 금융 산업의 지형을 변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외국의 경우 이미 대형 전통 금융사들이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하여 토큰 형태로 증권을 발행하는 케이스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면 이미 그 트렌드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토큰 형태로 발행된 금융 상품의 주목할 만한 사례로는 최근 홍콩 정부가 발표한 친환경 녹색채권을 들 수 있다. 지난 2월 홍콩 정부는 대형은행 4군데(중국은행, 크레딧 아그리콜 은행, 골드만삭스, HSBC)를 통해 8억 홍콩 달러(약 1313억원) 규모의 토큰화 녹색채권을 발행했다. 1년 만기인 해당 채권은 매수자들에게 4.05%의 수익률을 지급한다. 채권 매수와 이자 수익에 대한 기록은 특정 은행의 내부 원장이 아니라 골드만삭스가 개발한 분산원장 플랫폼에 기록된다. 채권 매수자는 토큰만 사서 보유하고만 있으면 분산원장에 기록된 정보에 기반하여 만기에 자동으로 원금과 이자를 돌려받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케이스는 지난 2022년 9월, 대형 사모펀드인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가 자사의 비상장 주식 펀드(PE펀드) 중 하나인 '헬스케어 전략성장펀드'의 토큰화를 추진한 사례다. 참고로 KKR은 2021년 기준 4590억 달러(약 631조원)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사모펀드다. 헬스케어 전략성장펀드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비상장 헬스케어 기업들에 투자하는 펀드로, 원래 초고액 자산가 및 기관 투자자만 접근할 수 있었다. KKR은 토큰증권의 구성과 발행을 도와주는 '시큐리타이즈(Securitize)'라는 서비스와 협업하여 아발란체 블록체인에 해당 펀드를 토큰화하여 발행했다. 이를 통해 투자가능 자산이 50억 원 이상인 '고액 자산가' 개인도 펀드에 투자할 수 있게 됐다. 시큐리타이즈가 고안한 간편한 온라인 펀드 가입 프로세스를 통해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사모펀드 투자에 대한 개인의 접근성을 낮췄다. 펀드 입장에서는 거래를 모니터링하고 투자자를 심사하는 과정이 더 원활해졌다. KKR은 앞으로도 다양한 펀드를 토큰 형태로 발행하여 고객 저변을 넓히고 더 큰 유동성을 불러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토큰화된 증권은 기존 증권에 비해 여러 가지 이점을 제공한다. 우선 중개인 없이도 쉽게 증권을 사고 팔 수 있어 거래 비용이 절감되며 부분 소유(조각투자)가 가능해 해당 증권에 대한 투자자의 접근성이 높아진다. 이는 증권 발행사 입장에서도 효율적으로 전략을 세우고 유동성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블록체인 위에서 거래되므로 연중무휴 24시간 거래가 가능해 투자자의 유연성이 높아지고 시장 상황과 뉴스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둘째로 토큰화된 증권은 프로그래밍이 가능하기 때문에 배당금 지급이나 이자 지급 등 계약 조건을 미리 설정한 대로 자동 실행할 수 있다. 이러한 프로그래밍 기능은 원래 중간에서 이런 역할을 해주던 증권사 인력 등 제 3자를 배제시켜 비용을 절감하고 투자의 효율성을 높여준다. 발행사는 금융 상품을 구조화할 때 더욱 다양한 컨셉의 새로운 전략을 시도해볼 수 있어서 좋다.
셋째로 토큰화된 증권은 투명성과 안전성을 강화하여 금융사고 가능성을 줄여준다. 증권에 대한 소유권 및 거래 데이터가 블록체인에 기록되어 중간자가 거래를 관리하고 검증할 필요가 없어지므로 오류와 사기의 가능성이 줄어들게 된다. 또한 모두에게 실시간 공개되어있는 블록체인 원장이므로 규제 당국의 규제 준수 모니터링이 용이해져 금융시장의 투명성이 개선된다.
결과적으로 토큰화된 증권은 금융 시장이 자본을 조달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하여 더 많은 투자자를 쉽게 유치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증권이 토큰 형태로 발행되면 기존의 방식보다 발행과 유통에 드는 비용과 복잡성이 줄어들어 소규모 기관도 투자은행이나 기타 중개기관에 의존하지 않고 효율적으로 자본을 조달할 수 있다. 또한 블록체인 위에서 관리되는 발행과 유통, 거래 데이터는 기존의 기관별로 따로따로 관리되던 방식보다 높은 투명성을 제공하여 금융 시장의 더 큰 혁신과 성장을 이끌 수 있다.
자신이 다루는 자산을 토큰화 하려는 움직임이 비단 증권가에서만 보이는건 아니다. 전 세계 대부분의 중앙은행들은 가까운 미래에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를 발행하기 위해 너도나도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CBDC는 블록체인 기술로 운영되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토큰화된 화폐의 한 형태로, 이를 일반 대중이 직접 사용하도록 하여 중앙은행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데 용이하다.
중앙은행이 CBDC 발행에 관심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통화 시스템에 보다 많은 사람이 접근하도록 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원래 중앙은행의 역할은 민간은행에 도매화폐 준비금을 발행하고 이를 토대로 민간은행이 경제 시스템에 소매화폐 현금과 대출을 확대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은행이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면 일반 시민에게 소매화폐를 직접 제공할 수 있다.
중앙은행 입장에서는 실시간으로 화폐의 흐름을 추적하고 그에 따라 금리를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민간은행을 거치지 않고 일반 시민들 손에 직접 쥐어진 CBDC가 통화 정책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더 큰 유연성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는 기존의 현금 기반 시스템이 필연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자금 세탁 및 기타 불법 활동을 방지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그동안 어떤 이유로든 은행 서비스를 이용할 없었던 개인을 금융 시스템 안에 들어오게 하여 금융 포용성을 높이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물론 디지털화된 돈의 가장 큰 부작용은 바로 프라이버시다. CBDC는 정부가 단순히 돈을 '어디에 썼는지' 감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디에 쓸지'까지 결정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쥐어준다. 어느 도시에 대지진이 나서 수많은 이재민이 생기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정부는 곧장 해당 지역의 국민이 보유한 CBDC를 꼭 필요한 식료품이나 생필품을 사는 데만 쓰이도록 제한할 수 있다. 술, 담배 등 기호식품이나 사치품에는 사용에 제한이 걸리는 식으로 돈의 용처를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이에 반발하기라도 하면 즉시 전자지갑을 닫아버리거나 지갑 안에 들어있는 디지털 화폐를 몰수해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아직 CBDC가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사용되기도 전인데 벌써 사생활 침해 문제를 걱정하는 것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이 나만 있는 건 아닌 듯 하다. 미국 하원의 톰 에머(Tom Emmer) 의원은 이미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이 국민에게 직접 CBDC를 발행할 수 없도록 막는 법안을 발의한 상태다. 그도 나중에 CBDC가 통용되면 불거질 사생활 침해 문제를 벌써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쨋든 디지털 대전환의 바람이 금융 산업에도 불어닥치면서 토큰화된 증권과 CBDC의 사용이 증가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현상인듯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하나 있다. 다양한 증권과 화폐가 토큰화되어 발행될 때 그에 못지않게 다양한 블록체인이 쓰인다는 점이다. 한 블록체인에서 발행된 토큰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블록체인과 호환되지 않기 때문에 서로 거래될 수가 없다. 내가 들고있는 토큰보다 타인이 들고있는 다른 토큰이 좋아보여 서로 교환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발행 주체가 하나의 통일된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쓰는 것인데, 수많은 퍼블릭과 프라이빗 블록체인이 공존하는 현 상황을 봤을때 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앞서 소개한 홍콩 정부와 KKR이 발행한 토큰 증권도 각각 골드만삭스가 만든 분산원장 플랫폼과 아발란체 블록체인 위에서 발행되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표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온체인 상에서 거래될 수가 없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자면 구글 안드로이드 기반으로 만들어진 앱이 아이폰에서 실행되지 않고,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운영체제가 애플 맥북에서 구동되지 않는것과 비슷하다. 동일한 프로토콜 언어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앱(또는 토큰)은 서로 같은 운영체제 안에서는 자유롭게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으나 다른 언어 기반으로 만들어진 앱(또는 토큰)과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일수가 없다.
물론 단기적인 해결책은 있다. 지금 바이낸스나 업비트 등 중앙화 거래소들처럼 블록체인이 아니라 개별 기업의 서버에서 거래를 체결하는 것이다. 지금 미국 월가의 대형 금융사들이 협업하여 만들고 있다는 EDXM의 역할이 바로 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전통 금융기관들이 서로 토큰 증권을 거래할 수 있는 안정적인 시장을 제공하겠다는 목적이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아무리 유명한 대형 금융 기관들이 모여 만든 거래소라 하더라도 여전히 한 민간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일 뿐이다. 민간 기업이 전 세계 모든 중앙은행이 발행한 CBDC와 모든 금융기관들이 발행한 토큰 증권의 거래를 관장한다는 막중한 책임을 지기는 어렵다. 당연히 신뢰 문제도 대두될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서로 다른 블록체인에서 발행된 토큰을 제 3자 없이 교환할 수 있게하는 분산원장에 대한 표준화된 프로토콜이 필요하다. 전 세계의 모든 토큰화된 금융 상품과 CBDC가 서로 맞교환될 수 있는 곳은 당연히 가장 보편화되고 탈중앙화된 표준 네트워크여야 할 것이다. 비트코인은 현존하는 블록체인 네트워크 중 그 규모와 탈중앙성의 정도에 있어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때문에 네트워크 효과로 인해 마치 초창기 인터넷이 그랬던 것처럼 전 세계 정부와 금융 기관들로부터의 채택이 비약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비트코인도 하나의 블록체인일 뿐인데 어떻게 서로다른 규약을 가진 토큰이 한데 모여 거래되게 할 수 있는걸까. 비트코인의 레이어 2 솔루션인 라이트닝 네트워크는 서로 다른 블록체인간의 호환이라는 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한다. 라이트닝 네트워크는 다음 블록을 채굴할 때까지 10분을 기다릴 필요 없이 서로 즉각 거래하도록 도와주는 레이어 2 네트워크다. 이는 해시 타임록 계약 (HTLC)라는 스마트 계약 덕분에 구현이 가능하다.
이제 예를 들어보자. 중앙은행은 비트코인의 라이트닝 네트워크와 호환되는 스마트 계약 기술인 HTLC를 갖춘 분산원장기술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CBDC를 발행한다. 그리고 해당 CBDC는 역시 HTLC 기능을 갖춘 다른 토큰 증권 및 CBDC들과 비트코인 온체인에서 자유롭게 거래된다. 이렇게 스마트 계약을 통해 모든 디지털 자산이 호환되는 것을 '아토믹 스왑'이라고 한다.
아토믹 스왑의 핵심 개념은 제 3자의 개입이 없는 거래다. 각기 다른 블록체인 기술을 쓰는 디지털 화폐를 거래소 같은 제 3 기관을 통하지 않고도 거래하게 해주는 스마트 계약이라 할 수 있다. 아토믹 스왑은 거래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뒤집는다. 거래 상대방 위험, 교환 위험, 부도 위험 등 모든 위험 요소를 제거하도록 프로그래밍해서 거래하는 쌍방 모두를 위해 거래를 성사 또는 무산시킨다.
이미 실제로 HLTC를 통한 아토믹 스왑이 성공한 사례도 있다. 2019년 싱가포르 통화청과 캐나다 중앙은행, JP모건, 그리고 액센추어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분산원장기술 플랫폼에서 HTLC를 사용해 캐나다 달러와 싱가포르 달러간 아토믹 스왑을 성공적으로 구현했다. 캐나다 중앙은행은 분산원장기술 코다(Corda)를, 싱가포르 중앙은행은 쿼럼(Quorum)을 사용했다. 둘은 모두 각기 다른 민간 기업에서 제공하는 솔루션이다. 두 개의 분산원장 기술은 기본적으로 서로 차이가 있지만, 둘 다 HTLC를 허용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거래' 부분에서 호환이 가능하다.
만약 중앙은행과 금융 기관들이 자신들이 발행한 토큰증권과 CBDC가 번성하길 원한다면 HTLC 기능을 갖춘 분산원장 기술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토큰을 발행함으로써 아토믹 스왑 그룹에 합류할 것이다. 현재 라이트닝 네트워크는 약 5400 BTC (약 1억2000만 달러)수준의 거래를 처리하고 있으며 향후 HTLC 호환 토큰들이 거래될 수 있는 통합 네트워크로서 독보적인 지위를 구축하고 있다.
만약 전 세계 모든 디지털 토큰들이 라이트닝 네트워크 위에서 거래되는 날이 온다면 비트코인은 디지털 세상의 기축통화로 자리매김 할 가능성이 높다. 다른 모든 디지털 화폐의 가격이 그 발행자의 영향력과 무관하게 결국 비트코인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바로 하이퍼 비트코이나이제이션(Hyper-Bitcoinization)이다.
백훈종 샌드뱅크 COO는…
안전한 크립토 투자 앱 샌드뱅크(Sandbank)의 공동 창업자 겸 COO이자 "웹3.0 사용설명서"의 저자이다. 가상자산의 주류 금융시장 편입을 믿고 다양한 가상자산 투자상품을 만들어 투자자에게 제공하는 샌드뱅크를 만들었다. 국내에 올바르고 성숙한 가상자산 투자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각종 매스컴에 출연하여 지식을 전파하고 있다.
▶이 글은 암호화폐 투자 뉴스레터 구독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 소개한 외부 필진 칼럼이며 한국경제신문의 입장이 아닙니다.
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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