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도 돈 맡긴 스위스 비밀계좌, CS 몰락에 신뢰 흔들
비밀계좌, 익명이나 차명 아냐
이름 대신 코드 써 신원 보호
스위스 은행 보유 외국인 예금
3000兆…올해 韓예산의 5배
시계와 함께 대표산업인 금융
CS 몰락으로 명성에 금가
"크레디트스위스(CS)의 몰락은 금융 중심지 스위스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
스위스 2위 은행 CS가 유동성 위기 끝에 UBS에 인수된 다음날 파이낸셜타임스(FT)가 전한 스위스인들의 반응이다. CS의 몰락이 스위스인들에게 그만큼 큰 충격을 줬다는 내용이었다. 금융업은 시계 등 정밀 기계공업과 함께 스위스를 대표하는 산업이다. 특히 스위스 은행은 자산가들의 '비밀 계좌'로 유명하다. 이번 CS 사태로 비밀 계좌로 상징되는 스위스 은행의 명성에도 금이 가게 됐다.
스위스 비밀 계좌는 스위스 소재 은행에 개설된 계좌 중에서도 숫자와 알파벳 문자로 조합된 코드를 예금주 이름 대신 사용하는 계좌를 말한다. 입·출금 등 각종 금융 거래를 할 때 이름을 쓰지 않고 '32467KDA9'와 같은 코드를 사용하는 것이다.
비밀 계좌는 익명이나 차명 계좌는 아니다. 계좌를 개설하려면 신분증을 제시하고 은행이 요구하는 정보를 알려줘야 한다. 다만 금융 거래 과정에서 이름 대신 코드 번호를 사용해 은행 직원들도 예금주의 신원을 알 수 없다. 비밀 계좌의 잔액과 거래 내역은 은행 직원 중에서도 아주 일부만 열람할 수 있다.
어떤 이유로든 재산을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비밀 계좌의 고객이다. 스위스은행협회(SBA)에 따르면 스위스 은행들은 2021년 기준 2조6000억달러(약 3340조원)의 외국인 예금을 보유하고 있다. 올해 한국 정부 예산(639조원)의 다섯 배가 넘는 규모다. 전 세계 은행이 보유한 외국인 예금의 4분의 1 이상이 스위스 은행에 예치돼 있다.
스위스 비밀 계좌의 역사는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685년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신교도의 종교 자유를 보장하던 낭트 칙령을 폐지했다. 위그노라고 불린 프랑스의 신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이웃 나라로 갔다. 위그노 중에선 금융업에 종사한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 일부가 스위스에 정착해 금융업을 이어 나갔다.
역설적이게도 초기 스위스 은행의 주요 고객은 프랑스 왕족들이었다. 주변국과 전쟁을 치르는 데 돈이 필요했던 그들은 스위스 위그노들에게 돈을 빌렸다. 자신들이 쫓아낸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는 것이 계면쩍었는지 이들은 돈을 빌린 사실을 비밀로 해 달라고 요구했다.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가 태동한 연유다.
영세 중립국이라는 국제 정치적 지위도 장점으로 작용했다. 스위스는 전쟁 중에도 재산을 안전하게 도피시킬 수 있는 안전처로 통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유럽 각국이 전비 조달을 위해 부자에게 세금을 올리자 과세 회피 목적의 거금이 스위스 은행에 몰렸다.
스위스는 1934년 연방 은행 및 저축은행법을 개정해 은행이 고객 동의 없이 계좌 정보를 제3자에게 제공하지 못하도록 하고, 위반한 사람은 5년 이하 징역과 25만스위스프랑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유대인들은 나치 독일의 추적을 피해 재산을 스위스 은행에 숨겼다. 유대인을 탄압한 히틀러가 비자금을 넣어둔 곳도 스위스 은행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 프랑스 등은 스위스 은행에 예치된 나치 자산을 몰수하려고 했다. 스위스 은행들은 고객 정보 유출을 금지한 자국 법을 근거로 이런 요청을 거부했다. 대신 영국, 프랑스에 대규모 자금을 빌려줘 전후 복구를 도왔다. 작년 2월에는 세계 각국의 독재자는 물론 살인교사범, 인신매매범 등 중범죄자들이 CS에 비밀 계좌를 두고 자금을 운용한 사실이 뉴욕타임스 가디언 등 46개 언론의 공동 취재로 드러났다. 미국 정부는 스위스 은행에 테러 조직의 계좌 정보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미국인들의 탈세를 도왔다는 이유로 UBS CS 등에 거액의 벌금을 부과하며 압박을 가했다.
결국 스위스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도한 '은행정보 자동교환에 관한 국제협약(AEOI)'에 2017년 가입했다. 현재 스위스는 회원국 과세당국이 원할 경우 해당국 국민이 보유한 스위스 은행 내 계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스위스는 여전히 예금 고객의 비밀을 잘 지켜주는 나라에 속한다. 세계조세정의네트워크가 매년 발표하는 금융비밀지수에서 지난해 스위스는 미국에 이어 2위에 올라 있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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