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사상태' 놓인 유럽 IPO 시장…죄다 '유동성 천국' 美로 몰려가
"ARM 등 대어 줄줄이 뉴욕증시行"
유럽의 기업공개(IPO) 시장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악으로 후퇴했다. 고금리‧고물가 상황에 기업들이 상장 자체를 꺼리고 있는 데다 유망한 기업들은 죄다 뉴욕증시로 몰려가고 있어서다.
3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유럽 증시에 상장된 기업 수는 34개로, 2009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기업들이 IPO를 통해 조달한 금액 역시 14년 만에 가장 낮은 20억유로(약 3조4000억원)로 집계됐다. 유럽금융시장협회(AFME)에 따르면 자금 조달액은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42% 쪼그라들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인플레이션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가운데, 유럽중앙은행(ECB)이 긴축 페달에서 발을 떼지 않고 있어 조달 시장이 위축됐다는 분석이다. 어려운 환경을 뚫고 상장한 기업들의 주가 흐름이 좋지 않았던 것도 IPO의 매력을 떨어트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올해 영국 증시 최대어로 꼽혔던 핀테크 기업 CAB페이먼츠는 상장 첫날 주가가 10% 주저앉았다.
글로벌 회계법인 PwC의 영국 자본 시장 담당 파트너인 리처드 스필스버리는 "IPO 활동이 매우 극명하게 침체돼 있다"면서 "최근 상장한 기업들의 주가가 상당히 나빴기 때문에 시장에 '사는 즉시 떨어질 수 있다'는 공포감이 조성된 상태"라고 말했다.
상장을 앞둔 유럽 기업들이 줄줄이 미국 증시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점도 현지 IPO 시장을 위축되게 만드는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금융정보업체 딜로직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뉴욕증시에는 75개 기업이 상장해 115억달러(약 15조원)를 조달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와 유례없는 긴축 속도에 2015년 이후 가장 저조한 성적을 냈지만, 둔화 속도는 유럽 대비 느렸다는 평가다. FT는 "미국에는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사업에 돈을 대고자 하는 '열정적인' 투자자들과 자본이 더 많다는 인식이 있다"고 전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의 반도체 설계 전문기업 ARM이다. 일본 소프트뱅크가 소유한 이 기업은 애초 영국과 미국 동시 상장을 고려했지만, 장고 끝에 뉴욕증시 단독 상장을 결정했다. 당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투자자 기반이 더 탄탄한 나스닥 시장에서 기업가치를 더 높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ARM의 조달 목표 금액은 80억~100억달러(약 10조4000억~13조원)로, 전 세계 주식시장에 걸쳐 올해 최대 규모다.
자국 증시에서 이미 거래되고 있는 기업들이 미국으로 뒤늦게 넘어가는 사례까지 나온다. 올해 상반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금광 기업인 앵글로골드 아산티와 세계 최대 건축 자재 기업인 CRH가 각각 요하네스버그, 런던 증시에서 뉴욕증시로 이전 상장을 결정했다. 유럽 초대형 에너지 기업 셸과 토탈은 자사가 미국의 엑손모빌, 셰브론 대비 저평가돼있는 데 대한 책임을 유럽 증시 상장으로 돌리기도 했다.
AFME의 훌리오 수아레스 연구 책임자는 "유럽 기업들이 미국의 더 나은 유동성을 찾아 해외 상장을 선호하게 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며 "구조적으로 위험 자산에는 미국의 자본시장이 더욱 매력적이며, 유럽은 경쟁력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게리 시몬스 AFME 매니징 디렉터도 "유럽 시장이 미국에 밀리고 있다는 건 점점 더 자명해지고 있다"고 짚었다.
정책 당국은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섰다. 영국 정부는 연금 업계에 고성장 기업 투자를 압박했고, 유럽연합(EU)은 중형 기업들의 IPO 촉진을 위해 역내 상장 절차를 단순화하는 제도 개선에 착수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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