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취임 한 달 만에 실각 위기에 몰렸다. 감세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 번복하며 영국을 비롯한 세계 금융시장에 대혼란을 초래한 탓이다.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내년 영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낮춰잡았다.
영국 언론에서는 집권당인 보수당이 총선을 다시 치르는 것을 감수하고 이번주 내 총리 불신임안을 제출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온다. 감세안을 주도한 쿼지 콰텡 재무장관을 전격 경질하고 발탁한 제레미 헌트 신임 장관은 증세안으로 시장을 안정시키며 트러스 총리의 정치적 입지를 좁히고 있다.
○"내년 경기침체 더 심각"
16일(현지시간) 블룸버그에 따르면 골드만삭스는 이날 발간한 보고서에서 영국의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0.4%에서 -1%로 낮췄다고 밝혔다. 내년 말 기준 근원 인플레이션 전망치는 3.3%에서 3.1%로 하향 조정했다.
성장 전망을 낮춘 건 트러스 총리가 내걸었던 감세 정책을 철회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년부터 법인세율을 기존 19%에서 25%로 올리기로 한 보리스 존슨 전 총리의 계획을 백지화하겠다고 지난달 23일 발표했으나 지난 14일 이를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앞서 지난 3일 고소득자 감세안을 철회한 데 이어 두 번째 정책 후퇴다. 보고서는 "성장 모멘텀 약화와 재정 여건 축소, 내년 4월 법인세 인상 등을 감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조정했다"며 "내년에 더 심각한 경기 침체가 닥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에 대한 신뢰도 하락으로 국채 금리가 급등(가격 하락)하자 부동산 시장과 기업활동에도 제동이 걸렸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이달 들어 영국 부동산 호가는 전년 동기 대비 7.8% 올라 1월 이후 가장 낮았다. 영국 금융기관들이 모기지 금리를 올리거나 대출을 중단한 여파다. 딜로이트는 지난달 20일부터 지난 3일까지 진행한 영국 최고재무책임자(CFO) 설문조사에 응답한 상위 기업 CFO 87명 중 56%가 최근 기업대출을 받는 데 예전보다 비용이 많이 든다고 응답했다고 밝혔다. 2010년 이후 최고치다. 차입 비용이 급등했기 때문이다.
금융시장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영·미 연기금은 최근 수 년간 부채에 레버리지 투자를 하는 파생상품인 '부채연계투자(LDI·liability driven investment)'를 늘렸다. LDI는 국채 가격이 떨어지면 손실이 커질 수 있다. 지난달 감세안 발표 후 영국 연기금은 국채 가격 급락으로 마진콜(추가 증거금 요구)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간 최고경영자(CEO)는 이를 두고 "또다른 폭발(blowups)들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역대 최단 기간 총리 가능성
영국 현지에서는 트러스 총리가 수일 내 총리에서 축출될 수 있다는 보도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여당인 보수당은 그가 감세 기조를 굽히지 않을 때부터 강한 비판을 해 왔다.
타블로이드지는 보수당 의원 100명 이상이 보수당 평의원 모임인 1922 위원회의 그레이엄 브래디 위원장에게 트러스 총리에 대한 불신임투표를 요청하는 서한을 이번주 제출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가디언은 지난 보수당 경선에서 수낵 전 재무장관을 지지했던 보수당 중진 의원들이 17일 멜 스트라이드 전 재무장관과 만난다고 보도했다. 멜 전 장관도 감세안을 비판해온 인사다.
보수당은 지지율 하락 가능성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영국 여론조사업체 오피니움이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금 총선이 시행되면 노동당이 하원 의석 중 411석을 얻어 12년 만에 정권을 탈환할 전망이다. 보수당은 현재 의석(356석) 가운데 219석을 잃을 것으로 예상된다.
트러스 총리는 축출될 경우 영국 역사상 최단 기간 재임한 총리가 될 수도 있다. 기존 최단 기록은 1827년 취임 119일 만에 병사한 조지 캐닝 전 총리다.
한편 17일 영국 재무부는 헌트 신임 재무장관이 이날 세금과 재정 관련 대책을 일부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헌트 장관은 취임 직후 증세와 재정지출 절감을 지지하는 발언을 해 왔다. 재정 정책의 기존 발표 시기는 영국 중기재정전망이 나오는 이달 31일이지만 금융시장을 빠르게 안정시키기 위해 시기를 2주 앞당겼다. 이 소식에 달러 대비 파운드화 가치는 1%가량 상승했다.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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