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의존도 낮추기 본격화
'방패' 역할했던 TSMC 공장
중요성 점점 낮아질 전망
삼성도 미국 투자 압박 상황에서
'용인 300조 투자' 공개
미국과 협상 지렛대 역할
4월말 대통령 방미 중요
실리콘 실드(silicon shield). 우리말로는 '반도체 방패' 정도로 바꿀 수 있는 문구다. 전 세계가 의존하는 대만 반도체 산업이 중국의 무력 침략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할 것이란 뜻을 담고 있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했을 때 미국 등 우방국들이 대만 TSMC의 공장을 보호하기 위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2000년 출간된 미국의 정보기술(IT) 전문가 크레이그 에디슨의 저서 'Silicon Shield: Taiwan's Protection Against Chinese Attack'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최근 실리콘 실드 개념을 부정하는듯한 뉘앙스의 발언이 나왔다. 직접적인 이해관계자로 볼 수 있는 TSMC의 창업자 모리스 창(張忠謀)의 입을 통해서다. 그는 지난 16일 대만에서 열린 한 토론행사에서 "대만이 미국의 (반도체) 프렌드 쇼어링(friend shoring)에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프렌드 쇼어링은 미국이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안전한 동맹국으로 옮기는 전략을 뜻한다. 미국이 대만에 있는 TSMC 공장들을 '동맹국에 있는 (안전한) 공장'으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다.
모리스 창은 '대만이 곤경에 처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대만에 반도체를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러 차례 말했고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도 같은 말을 때때로 반복한다"며 "이것이 대만의 딜레마"라고 설명했다. 과거엔 미국이 TSMC의 대만 공장을 중국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란 기대가 컸지만, 지금은 달라졌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미국이 대만 공장을 중국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을 것이란 의미다.
미국의 움직임을 보면 모리스 창의 걱정이 '기우'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유력 언론은 수시로 "최첨단 반도체 생산의 92%가 대만에 몰려있고 이것이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 지원법을 앞세워 TSMC, 삼성전자 등 외국기업에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미국에 지어야 한다"고 압박한다.
미국 정부가 미국으로 반도체 공장을 짓게 하는 전략의 목표는 명확하다. 만에 하나 대만이 중국의 공격을 받아 TSMC 공장이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전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 큰 문제가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새벽 1시에 장비가 고장 나면 출근해 수리하는 근면한 근로자들이 있다"(모리스 창)는 대만의 생산 비중을 낮춰야 하는 TSMC 입장에선 부아가 치밀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모리스 창도 이날 미국 등으로의 이전이 불합리하다는 뜻을 여러 차례 나타냈다. 그는 "미국에서의 반도체 생산비용이 대만보다 50% 높을 것으로 봤는데, 최근엔 2배가 될 것 같다", "규제는 칩 제조 비용을 증가시키고 칩 생산 수익률에 영향을 줄 것이다", "세계화에 반하는 미국의 반도체 전략은 칩 가격을 높이고 전 세계 어디서나 쓸 수 있는 '산업의 쌀' 역할을 낮출 것"이란 발언을 쏟아냈다.
그럼에도 현실은 현실이다. TSMC는 '울며 겨자 먹기'로 첨단 반도체 공장을 대만에서 전 세계 우방국들로 분산시키려 하고 있다. TSMC가 미국 애리조나주에 공장을 하나 더 짓기로 결정하고 총투자금 400억달러를 투입하기로 한 것, 일본 구마모토에 첨단 공장을 건설하는 것, 독일 정부와 반도체 공장 신축 관련해 협상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대만 내 생산'을 고수했다가는 현실적인 문제가 닥칠 수 있어서다. 당장 애플 등 미국 고객사들의 압박이 크다. 애플, 퀄컴, 엔비디아 등 TSMC에 반도체 위탁생산을 맡기는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들은 미국 정부와 보조를 맞추고 있다. 공공연히 "미국 본토의 파운드리 공장에 주문을 맡길 것"이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TSMC가 전 세계에 공장을 짓는 건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삼성전자의 상황은 어떨까. 미국 정부로부터 받는 압박이 TSMC보다 덜한 건 사실이다. 파운드리 점유율이 TSMC보다 낮고, D램이나 낸드플래시 같은 메모리반도체와 관련해서도 일본 키오시아(낸드플래시), 미국 마이크론(D램) 같은 대체 기업이 존재하고 있어서다.
그런데도 삼성전자 역시 미국 정부로부터 '자국에 반도체공장을 지으라'는 요구를 꾸준히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달러를 투자해 파운드리공장을 짓기로 결정한 것도 마찬가지다. 경쟁사인 TSMC가 미국 본토에 공장을 짓기로 한 것, 미국 팹리스 고객사 확보 가능성 등을 감안했지만 당시 '미국 공장 건설'을 강하게 압박했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영향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지난 15일 미국이 아닌 국내에 최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선언했다. 경기 용인 710만㎡ 부지에 300조원을 들여 2042년까지 공장 5개를 신축할 계획이다.
전략적 판단이 녹아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일단 중국이다. 삼성전자는 2012년 이후 중국 시안에 시설투자로만 33조원을 투입했다. 2개의 공장이 돌아가고 있고 이곳에선 최첨단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의 128단 낸드플래시가 생산돼 중국 고객사에 납품된다. 미국 정부가 대(對)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규제를 시작하면서 삼성전자에도 '발등의 불'이 떨어졌다. 미국 정부는 '128단 이상' 낸드플래시 양산에 생산되는 장비의 중국 수출을 막았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0월 '1년 적용 유예'를 받긴 했지만 당장 올해 10월 연장 여부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면 시안 공장의 가치는 크게 떨어지게 된다.
삼성전자는 의도치 않게 중국 비중을 서서히 낮출 필요성이 커졌다. 대안으로 국내 비중 확대, 특히 용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용인에 대해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 즉 파운드리공장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삼성전자는 공식적으로 어떤 공장을 지을지 밝히지 않았다. 메모리반도체 공장을 지을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평택의 사례를 볼 때 용인 역시 메모리반도체가 들어가는 '복합단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 삼성전자는 평택 1~3공장에도 D램, 낸드플래시, 파운드리 라인을 동시에 넣고 있다.
두 번째는 미국이다. 요즘 삼성에선 "우리가 굳이 미국에 공장을 지어야 하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미국 공장은 높은 인건비 등의 영향으로 비용이 더 든다. 모리스 창의 얘기처럼 '2배' 이상 들어갈 가능성도 있다. 그걸 상쇄하는 게 미국 정부가 꺼낸 '보조금' 카드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보조금 관련 발표 이후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정책'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보조금을 3조원 정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영업 기밀로 분류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초과 이익의 75%는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 투자 10년간 금지' 같은 가드레일(안전조치) 조항도 예고했다. 반도체업계에선 "삼성전자, TSMC는 물론 인텔, 마이크론 같은 미국기업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란 평가가 우세하다.
미국 정부는 이달 중에 좀 더 자세한 조항을 공개하고 본격적으로 삼성전자, TSMC 같은 기업들과 협상을 시작할 계획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가 '용인 투자'를 공식화한 것은 '미국에 끌려다니지만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으로 분석된다. "삼성전자는 굳이 미국에 투자하지 않아도 한국이라는 대안이 있다"는 뜻을 미국 정부에 전달했다는 평가다.
미국 정부의 '최첨단 반도체 공장 유치'와 '자국 반도체 제조 산업 육성'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감안할 때 삼성전자가 미국 투자를 줄이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삼성전자가 300조원을 용인에 투자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기간(20년)으로 나눠보면 1년에 15조원 정도다. 삼성전자의 연간 반도체 투자액(약 48조원)을 감안할 때 '엄청나게 큰' 금액은 아니다. 용인뿐만 아니라 미국 같은 국가에 대한 투자를 늘릴 수 있는 여지를 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 '미국 투자에 대한 반대급부'다. 분수령은 4월 26일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이 될 전망이다. 윤 대통령과 통상 관료들, 방미에 동행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반도체 부문 고위 경영진들은 미국으로부터 '규제 유예 연장', '중국 투자 금지 조항에 메모리반도체는 예외로 한다' 같은 유리한 내용을 끌어내야 한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운명을 좌우할 또 하나의 대형 이벤트가 다가오고 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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