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침체 전망에도 "물가 관리가 우선" 의견 대세
독일과 스페인 등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 경제 대국들의 인플레이션이 '끈적하게(sticky)' 유지되면서 유럽중앙은행(ECB)이 추가 금리 인상을 단행할 거란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다.
유럽 주요국들의 경기가 빠른 속도로 가라앉고 있지만, 물가 관리를 위해선 긴축 기조를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데 통화 정책 결정자들의 의견이 모이는 분위기다. 당장 오는 9월 14일 통화정책회의에서 10회 연속 인상을 이어가야 한다고 공개 발언에 나선 인사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30일(현지시간) "이달 독일의 물가 상승률이 시장 예상을 뛰어넘고 스페인 물가도 3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자 ECB가 다음 달 금리를 한 차례 더 올릴 거란 관측에 베팅하는 투자자들이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독일 연방 통계청은 이날 8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년 동기 대비 6.4% 올랐다고 발표했다. 전월(6.5%)보다는 소폭 내렸지만, 전문가 전망치(6.2%)를 웃돌았다. 식품 물가 상승률이 전월 11.0%에서 9.0%로, 서비스 물가 상승률이 5.2%에서 5.1%로 둔화했지만, 최근 완화하는 추세였던 에너지 가격 상승률이 5.7%에서 8.3%로 다시 뛰었다.
독일의 수입 물가가 1987년 이래 최대 폭인 13.2% 떨어진 데다 정부가 올해 여름 대중교통 요금을 낮췄기 때문에 다음 달부터는 물가 하락세를 점치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변동성이 큰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 CPI가 5.5%로, ECB 정책 목표(2%)의 두 배가 넘는 수준에서 견고하게 머무르고 있어 갈 길이 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네덜란드 은행 ING의 카르스텐 브제스키 이코노미스트는 "올해 2분기 독일의 임금이 기록적인 수준인 6.6%의 상승률을 나타냈는데, 이는 소비 지출을 자극해 서비스 가격 상승을 부추길 수 있다"며 "CPI의 하락 속도는 ECB에겐 여전히 편안한 수준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같은 날 스페인 통계청(INE)도 8월 CPI가 전년 동월보다 2.6% 상승했다고 밝혔다. 로이터가 조사한 시장 평균 전망치와 일치했지만, 7월(2.3%)보다 소폭 올랐다. 다만 근원 CPI 상승률이 6.1%로 매우 높은 수준이다. 스페인은 유로존 국가 중 물가 상승률이 가장 낮은 편에 속하지만, 최근 두 달 새 인플레이션이 가속화했다. 스페인 역시 연료비가 오른 영향이 컸다.
마르크 데 뮤즌 도이체방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상품 가격에 매우 큰 부정적 충격이 가해지지 않는 이상 CPI 상승률이 1% 아래로 내려갈 가능성은 매우 낮다"며 "올해 4분기 CPI는 3.0% 위로 더 많이 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런 분위기는 유로존 전반에 퍼져 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유로존 내에서 가격 상승을 예상한 기업들의 비율은 지난해 가을 이후 처음으로 늘었다. 향후 12개월간 물가 상승을 예측한 소비자 비율도 1년여 만에 최대 폭으로 커졌다.
8월 CPI는 다음 달 14일 통화정책회의 전 마지막 물가 지표라는 점에서 ECB 통화 정책의 방향성을 결정할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올해 주요 선진국 중 유일하게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는 독일을 비롯해 유로존 국가들의 경기 전망은 암울하다. EU의 경제성장심리지수는 2020년 8월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고, 기업들의 고용 기대 심리 역시 2021년 4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까지 내려앉으며 고용 시장 둔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스페인 등 경제 규모가 큰 나라들의 물가가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어 추가 긴축을 점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오스트리아 중앙은행 총재이자 ECB 위원인 로버트 홀츠만은 블룸버그통신 인터뷰에서 "EU 경제는 위험에 처해 있지 않다"며 "뜻밖의 소식이 없다면, 연속해서 금리 인상을 강행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인플레이션에 관한 한, 우리는 아직 분명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물가 관련 위험을 평가하기 위해 모든 데이터를 주시할 것"이라면서도 "노동 시장 경색에 따라 대규모 임금 인상이 단행될 가능성도 있다"며 경기 침체보다는 물가 관리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홀츠만은 ECB 내에서도 매파(hawkish‧통화 긴축 선호)에 속하는 인물이다. 앞서 요아힘 나겔 독일 중앙은행 총재, 마틴스 라작스 라트비아 중앙은행 총재 등도 홀츠만 총재와 같은 의견을 냈다. 홀츠만은 "금리 정점에 빨리 도달해야 더 빨리 인하할 수 있다"며 "현재 시장은 자주 멈추는(stop-and-go) 금리 경로를 소화하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앞서 ECB는 지난 7월 통화정책 이사회에서 기준금리를 4.25%로 9회 연속 올렸다. ECB는 지난해 7월 11년 만에 처음으로 빅스텝(0.5%포인트 인상)을 단행했고, 같은 해 9~10월 연속 자이언트스텝(0.75%포인트 인상)을 밟았다. 이후 세 차례 연속 빅스텝을 이어간 뒤 베이비스텝(0.25%포인트 인상)으로 속도 조절에 나섰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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